ADVERTISEMENT
오피니언 정진홍의소프트파워

도야마 유조와 지바 도시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얼마 전 운파(雲波) 임원식(1919~2002) 선생 5주기 추모 음악회가 열렸다. 운파 선생은 1919년 평북 의주 생으로 하얼빈제일음악학교와 일본 도쿄음악학교를 거쳐 미국 줄리아드 음악대학에서 지휘와 작곡을 공부한 국내 음악계 1세대 ‘거목’이었다. 특히 그는 일찍이 예술 영재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해 예원학교와 서울예고의 설립과 운영을 주도했던 우리나라 예술교육계의 원로였다.

그런데 2003년 이후 해마다 열린 운파 추모음악회에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참석하는 일본인이 있다. 바로 NHK교향악단의 종신지휘자인 원로 음악가 도야마 유조(外山雄三)다. 그는 자신의 연습실에 두 사람의 사진을 걸어 놓았다. 하나는 자신의 아버지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운파 선생이다. 운파 추모 음악회에서 연미복을 차려 입은 그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단정하고 단아했다. 지휘하는 그의 몸짓은 결코 과장되지 않았고 마치 사무라이 같은 단호함과 간결함이 배어 있었다.

그런데 추모 음악회의 마지막 순간, 운파 선생의 생전 모습과 글이 스크린에 재현되는 동안 혼신을 다해 지휘를 끝낸 도야마 유조는 조용히 악보를 가슴에 대고 한동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는 몸을 돌려 청중에게도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여전히 가슴에 악보를 대고서 말이다. 그것은 먼저 간 운파 선생에 대한 최고의 예의를 표한 모습이었고 그것을 지켜본 관객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남긴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운파 선생과 도야마 유조 간의 지속적인 혼이 담긴 관계를 바라보면서 또 다시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다름 아닌 안중근(1879~1910) 의사와 지바 도시치(千葉十七)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30분 만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향해 권총 3발을 명중시켜 즉사시킨 안 의사를 모를 사람은 없다. 그런데 하얼빈 현장에서 잡힌 안 의사가 여순형무소에 수감돼 사형당할 때까지 5개월여를 함께했던 일본헌병 출신 간수 지바 도시치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반 없다.

1910년 3월 26일 새벽, 여순 감옥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안 의사는 여느 날과 다름 없이 몸가짐을 정제한 후 어머니가 보내 준 순백의 한복으로 갈아입고 기도를 올렸다. 사형 집행의 시간이 다가오자, 안 의사는 지바를 향해 “일전에 내게 부탁했던 글씨를 지금 씁시다”라고 말했다. 지바는 정성껏 비단과 필묵을 준비했다. 안 의사는 자세를 가다듬고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이라 쓰고 왼손 약지가 절단된 손의 수장까지 찍어 지바에게 건네 주었다.

그후 지바 도시치는 죽음 앞에서조차 의연했던 안 의사에게 감복해 자신이 죽을 때까지 아침저녁으로 안 의사 영전에 치성을 올리며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자신이 죽을 때 아내에게 “안 의사의 유묵(遺墨)을 소중히 간직하고 자신과 안 의사의 위패를 함께 모셔 조석으로 공양하라”는 유언까지 남겼다. 지바의 아내 기쓰요 역시 1965년 7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유언을 그대로 이행했고 79년에는 지바 도시치와 기쓰요의 유족들이 안 의사 탄신 백주년에 맞춰 그동안 가보로 소중히 보관해 온 안 의사의 유묵을 안 의사 숭모회에 전달했다. 참으로 혼과 정성이 담긴 최상의 숭모가 아닐 수 없었다.

운파의 추모일은 지난달 26일이었고 내일은 바로 안 의사의 탄신일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 사람에 대한 도리를 다한다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는 세월이지만 운파를 추모하며 보여 준 도야마 유조의 모습과 안 의사를 숭모하길 대를 이어 계속했던 지바 도시치의 사례에서 우리는 또 다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에 대한 예의, 사람에 대한 도리를 말이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