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李 前부총리 영전에] 오늘 행동하며 내일 준비했던 지성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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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빈 선생님, 그는 타고난 지도자이셨다. 개척자이자 전인(全人)이셨고, 도덕적으로 모범이 되셨다. 관료였고, 학자였고, 외교관이었고, NGO 리더였던 선생님은 한마디로 행동하는 국사(國士)이셨다. 경제.행정.학문.외교.과학.종교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구촌을 무대로 삼으셨다.

그런 선생님이 7년간이나 병석에 계시다 떠나신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선생님 특유의 넓은 네트워크를 지금까지 건강하게 활보하셨다면 이 나라 운명이 지금과는 꽤 달라졌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재무부 관료로 출발해 경제 부총리까지 올랐으나 선생님은 관료라는 고식적 한계와 부총리라는 직급을 뛰어넘으셨다. 그는 한국전쟁이 나자 미국에서 유학하던 중 자진 귀국하신 애국자이셨고, 재무부 차관으로 재직할 때도 심지가 깊어 5.16 군사정권과 거리를 두었다가 스위스 대사로 밀려나기도 하셨다. 스위스 대사 시절 작은 나라가 사는 길을 모색하다 뒤에 학자로 변신하셨다.

한국전쟁 이전에 미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을 다닌 선생님께선 학자로서 국가경영.국가 엘리트 형성이라는 주제에 정진하셨다. 서울대 행정대학원을 창설하시고 아주대와 한남대 총장으로 아카데미에 머무르신 선생님은 학생들의 스승이기보다 각계 지도자들의 생각을 세계로, 미래로 돌리게 한 지도자들의 스승이셨다. 그가 펼친 예악(禮樂)사회론.보통사람론 등은 시대를 내다본 국사로서의 혜안이었다.

선생님이 1968년 창설하신 한국미래학회는 미래 연구에 있어 국제적으로도 초기에 형성된 학회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학제(學際)간 종합학회였다. 또한 50년대 전쟁 복구기의 원조 외교, 10.26 사태 이후 80년 광주민주화운동 전까지의 민주화 외교, 80년대 후반 대(對)소련.대 중국 북방 외교에 끼친 족적은 해방 이후 제 1세대 국제파 선구자로서의 큰 공헌이었다.

58년 재무부 예산과장 시절 병아리 언론인으로서 처음 뵙고 62년 제네바 레만 호숫가에서 함께 나라를 걱정하던 추억, 80년 봄 부총리 시절 경제안정 정책을 수립하느라 고(故) 김재익 박사와 셋이서 비밀리에 경기도 이천 온천에 가서 두번이나 밤을 새웠던 고생이 새삼 간절한 그리움으로 밀려온다.

선생님, 하느님 곁에서 편안하소서. 못다하신 일은 미련한 후학들이 정진하겠습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김진현 세계평화포럼 이사장.전 과기처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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