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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평론가 강헌이 말하는 신세대 가수 김건모의 비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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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2박자의 트롯 리듬이 한국 대중음악사의 발생과 전개과정을 규정했다면 4박자의 고고리듬은 한국대중음악의 헤게모니가 일본에서미국으로 전환되는 음악적 결절점이었다.강박과 약박이 엇갈리는 이 4박자는 템포와 뉘앙스의 다양한 변용을 통해 70년대 이후우리 대중음악의 호흡을 지배해왔다.그리고 20여년이 지나 1994년의 김건모는 60년대 서인도제도의 자메이카에서 발원,미국의 메이저 음반산업이 디스코의 퇴조 이후 또하나의 유력한 리듬상품으로 조립한 레게(Reggae )리듬을 자신의 음악언어로 수용함으로써 신승훈.서태지에게 분할점령돼 있는 대중음악의 지형도에 강력한 도전장을 제출했다.
랩댄스뮤직이 급격한 퇴조의 기미를 보이고 있는 현상황에서 레게는 그것의 유력한 대체재로 부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그룹 닥터레게.소준영등 신인급에서부터 전인권.강인원등이 모인「느티나무언덕」같은 베테랑에 이르기까지 고고리듬의 강세 순 서를 뒤집어놓은 4박자의 레게 리듬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지고 있는 실정에서 김건모는 레게의 고향인 자메이카까지 날아가 CF와 뮤직비디오클립을 완성함으로써 적어도 한국에서는 내가 본류(?)라고주장하고 있는 듯하다.
지금 여기에서 레게음악이 인종차별에 대한 흑인들의 혁명적인 염원과 제3세계의 저개발과 종속에 대한 비판의식의 예술적 반영물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이제 거의 적실성을 상실한 진술로 몰려도 달리 할 말이 없지 않을까.92년 서태지에 의 해 폭발된 한국의 랩이 미국 도시빈민가 흑인들의 도전적인 하위문화와는 아무 상관도 없었듯이 김건모가 일으킨 레게 열풍의 핵심은 그러한사회적 입장을 함축한 레게음악이 아니라 단지 리듬의 수입 신상품에 불과하기 때문이며 나아가 대중음 악의 사조 자체가 더이상음악적 내용과 상관없는 음반산업의 라벨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라드와 랩댄스뮤직의 양대 거물들이 충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시점에서 욱일승천하고 있는 김건모의 도전은 진정으로 재편되고 있는 한국대중음악계의 질서를 엿보게 한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청한다.
주지하다시피 데뷔 직후의 김건모는 전형적인 브라운관의 아이들스타였다.그는 본업인 노래보다는 오락프로그램에서의 기민한 순발력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데 주력했고,따라서 그의 인기는 급조된 수많은 네트워크 스타들이 그러했듯이 금세 잊혀질 운명으로 보였다.
하지만 독기와 집중성의 흔적이라곤 찾아볼수 없게 천진스런 행보의 뒤안에서 그는 앨범 프러듀서 김창환의 철저한 계산과 정교한 전략 아래 빈틈없는 완성도를 지닌 2집 앨범을 제작했고,살인적인 경쟁의 벼랑까지 치달았던 쇼프로그램이 쇠락 의 기미를 보이자 언제 그랬느냐는듯이 스튜디오 대신 전국을 대상으로 한 라이브 투어를 성공적으로 밀어붙임으로써 그의 패권획득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의 이러한 발빠른 판단의 전환은 더 이상 방송국이 자신을 보호해주는 성채가 아님을,그리고 한두곡의 알량한 히트곡이 아니라 앨범 전체의 완성도만이 자신의 음악적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을 자각한데 있다.그는 93년의 숨막히는 정글의 생존경쟁 속에서 신승훈.서태지에 의해 확립된 앨범제작,라이브 투어,충전이라는 기계적인 순환의 리듬에 숨어 있는 비밀을 파악한 것이다. 여기에 김건모는「혼자만의 사랑」을 내세워 발라드 장르를,그리고「핑계」를 토해 댄스뮤직의 장르를 아우름으로써 현재 한국대중음악의 두 주류를 포괄하는 종합력을 가세한다.리듬앤 블루스.발라드.레게.힙합.하우스 뮤직.언플러그드.펑키-그가 수록곡들에 명명한 이 다양한 장르의 명칭들은 다소 허세가 느껴지기는 하지만 대중음악의 주류 장르 유치에 대해 그가 얼마나 절치부심한 것인가를 예증해 주는 보기 힘든 장면이다.
그는 음악에 관한 부분을 넘어 신세대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만족시키기로 작정한 것으로 보인다.가령 그에게는 아킬레스 건이었던 춤분야를 그야말로 피와 땀으로 뛰어넘었고 레게 본고장의 향취와 자신의 피부색에 조응하는 원색의 의상 스타 일을 장착함으로써 공격적인 패션에 매료되어 있는 젊은 세대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김건모는 마지막 한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명멸해간 80년대 이후 TV 아이들 스타 시대의 종언을 선포함과 동시에 멀티장르 아티스트 시대의 본격적인 개막 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결코 지나칠 수 없는 한가지 문제-대중음악 장르에 대한 그의 다양한 관심과는 달리 그의 앨범 가사는 일관되게 사랑에 대한 신세대적 통속성으로 시종한다.가사에 대한 한국대중음악의 위대한 순응주의를 되풀이하기에 앞서 이 시대의 젊은 대중음악 담당자들은 이제 가사는 음향을 이루는 의미없는 소음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그것이「혼자(살아)남는 법」이라고 정말이지「농담인듯,진담인듯」핑계를 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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