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백성호기자의현문우답] 어디를 향해 기도하십니까? <19>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8면

중국 마조(馬祖·709~788)선사의 문하에 대매(大梅)라는 제자가 있었죠. 처음 마조 선사를 만났을 때 대매가 물었습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마조 선사가 대답했죠.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다.” 대매는 홀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죠. 그리고 스승의 가르침을 안고 참선에 들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죠. 마조 선사는 대매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제자의 공부’를 떠보기 위함이었죠. 그 사람이 대매를 만나 물었습니다.

“스님은 누구의 제자입니까?”

“마조 선사요”

“마조 선사의 문하에서 무엇을 배웠습니까?”

“단 한 마디, ‘마음이 부처’라고 하셨소.”

“거참, 이상하군요. 요즘 마조 선사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라고 가르치고 있거든요.”

그러자 대매가 소리를 버럭 질렀죠. “아니, 그 늙은이가 아직도 죽지 않고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구나. 그래도 나는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다.” 이 얘기를 들은 마조 선사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죠. 그리고 제자들을 모아 놓고 말했죠. “매실이 다 익었으니 그대들은 가서 마음껏 따먹도록 하라.”

복잡한가요?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 있는 마음’이고, 또 하나는 ‘마음 없는 마음’이죠. ‘마음 있는 마음’은 열이면 열 ‘형상’을 붙들고 있죠. 그 속에는 ‘형상’에 대한 집착, ‘형상에 대한 바람, ’형상‘에 대한 욕망이 있죠. 그래서 ‘형상’ 안에서만 맴돕니다. ‘형상’ 너머를 못 보는 거죠. 그래서 ‘부처’가 보이질 않습니다. ‘부처’는 늘 형상 너머에 있으니까요.

그럼 ‘마음 없는 마음’은 어떨까요? 그 마음은 ‘형상’을 붙들지 않죠. 오히려 ‘형상’을 여의죠. 그래서 ‘형상’ 너머가 보이죠. 그곳에 흐르는 ‘부처’가 보이죠. 그래서 마음이 곧 부처, 즉심즉불(卽心卽佛)이 되는 겁니다. 반면 마음 있는 마음은 ‘비심비불(非心非佛)’이 되는 거죠.

사람들은 절에 가서 절을 하죠. 삼배도 하고, 백팔배도 하고, 삼천배도 하죠. 하지만 따져보세요. ‘나는 어디를 향해 기도를 하는가’. 집착과 바람을 향하는가, 아니면 마음 없는 마음을 향하는가. 나의 기도가 ‘형상’을 향하는가, 아니면 ‘본질’을 향하는가 살펴봐야죠.

기독교에선 ‘우상(偶像)’을 섬기지 말라’고 합니다. ‘우상’이란 게 뭔가요. 이교도의 숱한 상징만이 ‘우상’인가요. 천만에요. ‘형상’으로 붙들고 있는 내 안의 신이 바로 ‘우상’이죠. 나무나 돌로 빚어야만 ‘우상’이 아닙니다. 내가 만든 예수, 내가 빚은 부처가 바로 ‘우상’이죠. ‘우상’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내 마음의 예수, 내 마음의 부처도 ‘우상’일 수 있는 거죠.

예수님은 “나는 알파요(시작), 오메가(끝)”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알파 이전의 예수, 오메가 이후의 예수를 찾아야죠.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부모로부터 몸 받기 전)의 부처를 찾아야죠. 원래부터 있던 예수, 본래부터 있던 부처를 찾아야죠. 왜냐고요? 거기에만 생명이 있기 때문이죠. 모든 ‘우상’은 박제에 불과하죠. 숨을 쉬지 않죠. 생명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따져보고, 짚어봐야죠. 내 안의 예수가 숨을 쉬나, 내 안의 부처가 살아있나. 바로 ‘지금, 여기’서 말이죠.

백성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