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란기자와도란도란] 빚내서 투자? 빗나간 투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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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과거를 모두 기억한다면 괴로워 못 산다. 망각은 현재를 살기 위한 인간의 자기방어 수단이다.

얼마 전까지 나도 잊고 있었다. '시장이 무섭다'는 것을. 지난 16일 지수는 바닥을 모르고 추락했다. 하루 새 73조원이 날아갔다. 그제서야 기억났다.

언젠가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2000년 기술주(IT) 버블의 끝자락, 수백만 원으로 수억을 벌었다라던 전설이 회자될 때다. 대학에 다니던 시절, 나도 전설까지는 아니고 용돈이나 벌어볼까 싶었다.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밑천 삼아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당시 난 탐욕에 눈이 멀었다. 하지 말라는 짓은 다했다. 초단타 매매, 급등주 따라잡기, 뇌동(雷同) 매매….

그중에서도 가장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말았다. 미수(未收). 주식을 사는데 선금만 걸고 잔금은 이틀 후까지만 치르면 되는 제도다. 이걸 이용하면 100만원을 가지고도 300만원어치를 살 수 있다. 잔금 치르는 날짜가 오기 전 주식을 팔면 문제될 것 없다(지금은 '미수동결계좌제도'가 시행돼 사정이 조금 다르다). 2%만 올라줘도 100만원으로 하루에 5만원 넘게 벌게 되는 셈이다. 밑천이 달리는 내겐 대단한 유혹이었다. 몇 번 미수로 단타를 쳐서 재미를 봤다. 그렇게 미수에 맛을 들였다.

그러다 제대로 쓴맛을 봤다. 상한가로 치솟을 것 같은 종목을 10% 정도 올랐을 때 잡았다. 사자마자 상한가에 '팔자'로 내놨는데 내가 산 가격이 꼭지였다. 이후 상승폭을 줄이더니 결국 강보합세로 장을 마쳤다. 불안했지만 내일 팔면 되겠다 싶었다. 그런데 다음날, 장이 열리자마자 하한가로 추락했다. 이유는 잘 기억이 안 난다. 하여간 팔 기회조차 없었다. 다음날도 하한가. 3일째 반대매매가 들어왔다. 잔금을 못 치르니 증권사가 알아서 주식을 처분했다. 원금의 절반이 날아갔다.

최근 급락에 누구보다 가슴 졸였을 이는 신용융자 서비스를 이용해 주식을 산 사람이겠다. 주가는 떨어지는데 상환 날짜는 돌아오고…. 일부는 담보 가치가 떨어졌다며 돈을 더 입금하라는 연락도 받았을 게다. 빚으로 투자하면 초조해 질 수밖에 없다. 공포감에 휩싸인다. 이성은 존재를 감춘다. 그래서 앞뒤 잴 것 없이 일단 던지고 본다.

빚 앞에 장사 없다. 결국 전 세계 증시 불안을 유발한 것도 빚을 내(레버리지를 일으켜) 투자한 헤지펀드의 파산이다. 천재들이 모였다는 데도 소용없었다. 주식은 여유자금으로 해야 한다는 증시 격언이 절실한 요즘이다.

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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