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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찰 장비선진화 급하다(경찰과 시민사회:17·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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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순찰차는 자국 최고급차 지급해야/수사형사 차량 운영비도 못받아
미국 뉴욕경찰청 감식과. 한 시민과 경찰관이 컴퓨터 앞에 나란히 앉아 있다. 슈퍼마킷을 운영하는 이 시민은 조금전 자신의 가게에 침입해 권총으로 위협,현금을 강탈해간 범인의 인상착의를 설명하고 있었다. 경찰은 시민이 설명하는대로 컴퓨터를 조작,화면에 나타난 범인의 윤곽을 수정해나간다. 눈썹형태,눈동자색깔,머리스타일 등….
이렇게 해서 경찰이 범인의 몽타주를 완성한 것은 작업시작 20여분후. 몽타주 영상처리시스팀으로 불리는 이 컴퓨터엔 수천가지의 얼굴 패턴이 입력돼 있어 목격자의 기억대로 자료를 불러내 화상으로 조합한다. 선진국 경찰에 보편화돼있는 장비중 하나다.
그러나 우리 경찰은 아직 그 기계를 갖고 있지 않다. 범인의 몽타주는 일일이 수작업으로 그린다. 몽타주 1장 그리는데 평균 3시간이 걸린다. 그나마 몽타주를 전문으로 그리는 사람은 전국 15만 경찰관중 단 1명뿐이다.
미국·유럽·일본경찰은 이미 오래전부터 첨단과학장비를 개발,수사에 실용화했다. 싱가포르·홍콩 등도 거의 과학경찰로 탈바꿈하고 있다. 피의자의 자백이나 진술보다 철저히 물적증거를 앞세우는 수사관행이 첨단장비 개발을 재촉한 것이다.
때문에 선진국에서는 살인 등 강력사건 현장에 반드시 감시요원이 먼저 들어간다. 첨단장비로 범인의 유류품을 찾기 위해서다.
눈으로 식별되지 않는 범인의 족적이나 지문도 고강도 자외선을 비추면 훤히 드러난다. 범행도중 범인의 몸에서 떨어진 분진이나 미세한 털,옷에서 떨어진 섬유까지도 첨단장비는 거의 찾아낸다. 수사경찰을 먼저 현장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현장을 훼손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경찰은 혈액·정액·모근세포에서 추출한 유전자(DNA)로 동일인 여부를 판명하는 최첨단 유전자 감식장비를 17개 지방청에 감춰놓고 있으며 내년까지 6억엔(47억여원)을 들여 전국 47개 지방청에 모두 들여놓을 계획이다. 미국·유럽 등의 경찰은 이미 70년대 말부터 지문감식을 컴퓨터로 해오고 있다. 일본도 82년부터 주민등록증을 발급받는 성인들의 지문을 경찰 컴퓨터에 입력해놓고 사건현장에서 컴퓨터가 자동으로 감식케 한다.
우리는 아직도 구형 분말식 지문감별기와 감식제트 하나만 달랑 든 감식반이 사건현장에 나타난다. 이 장비론 보이지 않는 것은 커녕 찍혀있는 지문도 제대로 뜰 수 없다는 것이 일선 경찰관들의 푸념이다. 우리 경찰의 초동수사에 가장 큰 문제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첨단장비는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경찰은 기본장비조차 턱없이 부족하다. 가장 기본적인 휴대장비라고 할 수 있는 무전기는 외근경찰관 4명당 1대꼴로 지급되고 있다. 그나마 40% 정도가 수명을 넘긴 고물이어서 송·수신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외근경찰관 모두에게 1대씩 지급하려면 3만대 정도가 부족하다. 일본은 외근경찰관 1인당 1대는 물론 요즘은 수신전용 무전기를 포함해 2대씩을 휴대케 하고 있다.
순찰차량도 부족하긴 마찬가지. 112 순찰차는 현재 2천2백28대로 전국 읍단위 이상 파출소에 1대씩 배정하고 있다.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려면 면단위까지 확대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112 순찰차의 법정 수명은 4년. 그러나 현재 절반은 수명이 다 됐거나 넘긴 차량들이다.
선진국은 각기 그 나라에서 생산된 자동차중 성능이 가장 좋은 차를 순찰차로 쓴다. 그만큼 경찰 순찰차는 국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일선 경찰관들은 112 순찰차가 24시간 가동하기 때문에 법정수명을 3년으로 줄여 교체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방범·교통순찰용 차량도 서울의 경우 1개 경찰서에 2대,다른지역은 1대씩 보유하고 있는데 지금보다 배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 경찰의 입장.
수사용 차량은 대부분 경찰서마다 절대량이 부족해 형사 개인의 승용차를 이용케하고 있다. 그럼에도 차량유지비 지원은 전무. 선진경찰이 벌이고 있는 기동성 있는 범죄수사와는 애초부터 거리가 있다. 일선경찰관들은 『10년,20년전과 마찬가지로 수갑·방망이만으로 범인을 잡으라는 것이냐』고 푸념한다. 선진국에선 거의 90% 이상 이용하는 거짓말탐지기도 우리는 아직 외면하고 있다. 법원이 증거로 잘 채택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선진국 경찰이 일상화하고 있는 첨단장비와 과학수사를 도입하려면 먼저 준비가 필요하다. 감식전문요원의 교육과 양성,시스팀 운영,과학수사 장비에 대한 과감한 투자 등이 그것이다.
미국은 1932년부터 연방수사국(FBI)에 범죄감식실험소를 두고 50개주의 수도와 대도시 경찰청에 같은 기관을 운영해왔다. FBI는 주요사건의 감식뿐만 아니라 전국 경찰·검찰·법원에 전문적인 감식기술을 지원하고 감식요원에 대한 교육까지 실시한다.
일본도 경찰청 산하 과학수사연구소가 전국 주요사건에 대한 감식과 감식경찰관에 대한 교육을 맡고 있으며 도·부·현의 지방경찰본부 54개소에 각각 과학수사연구소(실)를 두고 있다.
이들 국가의 경찰은 감식업무를 지방으로 분산시킴으로써 사건처리를 신속히 하고 있다. 또 양성한 감식요원도 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다. 인사상의 우대는 물론 각종 수당을 충분히 지급하고 있어 비전문 경찰보다 훨씬 좋은 대우를 받는다. 첨단과학장비를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인력을 키우는데 특히 신경을 쓴다. 반면 우리 경찰은 외국의 값비싼 첨단장비를 들여와도 당장 활용할 수 있는 전문인력이 없는 실정이다.
우리의 전문감식 인원은 모두 3백86명. 그러나 이중 경찰관은 34명에 불과하고 기능직이 2백43명,일용직이 1백9명이다. 지난해 기능직 47명 증원을 요청했으나 묵살당했다. 또 컴퓨터지문자동검색기를 지난해 도입했지만 운영요원 54명을 확보하지 못해 무용지물로 방치해두고 있다. 몽타주 영상처리시스팀 도입 비용 7천만원도 올 예산편성에서 깎였다.
선진국은 경찰에 대한 투자 자체를 사회간접자본으로 인식하고 있다. 지난해 워싱턴 시의회는 변두리지역 하수도설치와 경찰관들에 대한 야간근무 연장문제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어느 것이 시민생활에 도움이 될 것이냐에 대한 토론이었다. 결국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 더 시민사회를 편하게 해주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야간근무수당을 의결했다.<정재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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