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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년 중국 어뢰정 사건이 다리 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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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1992.8.24

"1985년 3월 중국 어뢰정 한 대가 서해로 표류하자 한국 정부가 사고 함정과 인원을 모두 중국으로 돌려보낸 일이 있습니다. 이 사건이 벌어진 뒤 얼마 있다가 당시 중국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이 재미 중국계 학자를 전두환 대통령에 보내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이를 계기로 한.중 양국 지도자 사이의 접촉이 활발하게 벌어졌습니다. 결정적 계기는 90년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때 한국 정부가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일입니다. 이 때문에 북한 문제로 고민하던 중국 지도부가 한국과의 수교를 결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 시절 총무처 장관을 역임한 김한규(67.사진) 한.중 우호교류협회 회장은 당시 올림픽에 간여하면서 양국 수교의 막전막후를 지켜본 인물이다. 그는 5공 정부가 중국을 이미 주목하기 시작했고, 이어 열린 서울 아시안 게임(86년)과 올림픽(88년), 나아가 베이징 아시안게임(90년) 등 양국의 대규모 행사가 수교의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때 베이징 상무부시장이었던 장바이파(張百發)가 대표단 단장으로 서울에 온 뒤 양국 정부는 여러 사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는 게 그의 회고다. 당시 장애인 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던 김 회장은 양국 수교 직전까지 스포츠 행사가 중요한 접촉 계기가 되면서 정부 간 막후에서 벌어지는 가교 역할을 맡았다.

그는 "중국으로서는 한국에서 벌어진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함으로써 관심을 보였고, 89년 벌어진 6.4 천안문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이듬해 예정된 베이징 아시안게임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게 최우선의 과제였다"고 말했다. "따라서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잇따라 치른 한국의 경험과 지원이 뭣보다 절실한 상황이었고, 실제 이 부분에 대한 지원 요청이 있었다"고 전했다.

중국과 수교한 뒤인 1992년 9월 27일 노태우 대통령이 처음 중국을 공식 방문, 베이징 인민대회당 동문 앞에서 양상쿤 당시 중국 국가주석과 함께 인민해방군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중앙포토]

중국 지도부는 당시 혈맹 격인 북한과의 관계를 고려해 한국과의 수교를 극도로 꺼리는 분위기였다. 김 회장은 "장바이파는 서울 아시안게임을 마친 뒤 돌아가 비공식 라인에서 양국 수교를 이끌어 낸 핵심 라인"이라며 "그를 통해 한국의 실정과 지도부 의중 등이 많이 전달됐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중국을 빈번하게 오가던 89년 베이징의 한 행사장에서 우연히 덩샤오핑과 조우한다. 당시 외국 인사와는 공개적으로 접촉을 피하던 덩은 김 회장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전해 들은 뒤 "진짜 실력자는 베이징시 관계자들"이라면서 스치듯 한마디를 던졌다. "나는 당시 '천시퉁(陳希同) 베이징 시장, 장바이파 부시장 등 베이징 당국과 잘 얘기해 보라'는 메시지로 들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중국은 움직임을 구체화했다. 김 회장은 "90년 아시안게임을 잘 치러내기 위해 중국 당국은 매우 긴장했다. 89년 여름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중국은 아시안게임을 위해 한국이 구체적인 도움을 달라고 요구했고, 한국은 정부 차원의 지원단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후원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한국은 당시 서울올림픽 때 사용하던 컴퓨터 등 기자재 상당량과 승용차 등을 지원했다.

김 회장은 "한국 담당 국무원 톈지윈(田紀雲) 부총리, 주량(朱良) 공산당 대외연락부장, 장바이파 부시장, 중국 대외무역촉진회 정훙예 회장 등이 한국과의 관계를 조율한 핵심 인물들"이라며 "특히 베이징 아시안게임에 대한 한국 정부의 지원을 눈여겨본 중국 지도부는 북한과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2년 뒤 한국과의 수교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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