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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북카페] 민족 특수성, 인류 보편성 깃든 ‘상상의 보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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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신화는 갯벌이다. 내 땅을 적시고 흐른 강이 흘러드는 곳이면서, 대양에서 달려든 파도가 기진하는 곳이다. 그러니까 신화는 민족의 특수성과 인류의 보편성이 갈마드는 경계다. 그곳에는 상상의 자원이 무진장 널려 있다. 화석이 아니다. 여태 살아 있어 모듬살이의 꿈이 무엇이었는가 귀띔해준다.

 이윤기의 『꽃아 꽃아 문 열어라』 (열림원)는 신화의 보편성을 말한다. ‘삼국유사’를 보면 알에서 태어난 인물이 숱하다. 마치 “우리 조상들은 알 이야기를 빼고는 신화를 쓰지 못하나”싶을 정도다. 박혁거세, 석탈해, 김알지, 수로, 주몽 등이 알에서 나왔다. 우리 신화에만 기록된 이야기는 아니다. 중국 창세신화에 나오는 반고도 알을 깨고 나왔다. 나일강의 기러기가 낳은 신이 이집트의 태양신 ‘라’다. 세계신화에 공통되는 요소를 신화소라 하는데, 이 경우는 우주란(宇宙卵)에 해당한다. 여기서 고대인들은 알을 “분화되지 않은 전체성과 잠재성의 상징이자 존재의 숨겨진 기원과 비밀의 상징”으로 여겼다는 것을 알게 된다.

 환웅이 타고 내려온 나무가 신령한 박달나무(神檀樹)다. 이 나무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궁금할 터. 북유럽 신화에는 세계의 중심에 뿌리박은 거대한 나무를 익드라실이라 했다. 만주족은 천신에게 제사 지낼 때 투루라고 하는 기둥을 세우고 조상짐승인 개 모양의 상을 얹었다. 투루를 달리 일러 하늘나무, 하늘 기둥이라고도 한다. 타타르족에게도 세계의 중심이 있다. 철산 한가운데 서 있는 일곱 가지 하얀색으로 빛나는 자작나무가 그것이다. 이런 신성한 나무를 일러 세계수라 했으니, 우주와 땅의 기운이 만나는 세계의 중심을 뜻한다. 박달나무는 껍질이 하얀 자작나무과라 한다.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신단수로 내려온 환웅이 단웅천왕이 되었다 기록해 이 나무의 신성성을 돋을새김했다. 신단수는 우리민족의 세계수인 것이다.

 『이어령의 삼국유사 이야기』(서정시학)은 민족의 특수성을 보듬어 안고 있다. 그리스 신화의 특징으로 단성 생식과 파괴를 들 수 있다. 아테네는 제우스의 머리에서, 아프로디테는 아비의 거세된 남성상징에서 나왔다. 우라노스는 괴물자식 티탄족을 가두고, 크로노스는 아비 우라노스를 거세하며, 크로노스는 아들 제우스에 의해 땅에 갇힌다. “갈등과 투쟁의 파괴로 이어지는 순환 속에서 무엇인가 창조의 힘을 얻어내는 것이 서구의 혁명사상이요, 대결의 역사관”이다. 하나, 단군신화를 볼라치면 하늘에 속한 환웅이 땅에 해당하는 웅녀와 결합해 인간세상을 만들어낸다. 조화와 융합의 세계관이 반영된 덕이다.

 오쟁이진 처용은 노래와 춤을 추어 역신(疫神)을 무릎 꿇게 했다. “악이나 폭력을 덕으로 퇴치한다는 것이 처용의 설화나 시의 핵심”이다. 서양의 영웅은 다르다. 아킬레우스나 오디세우스는 간부를 힘으로 물리쳤다. 말하자면, 서양의 영웅이 호랑이 형이라면, 우리민족의 영웅은 곰 형인 셈이다.

일러스트=강일구 기자

 ‘삼국유사’에는 오늘의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가 숨어 있다. 노례와 탈해가 서로 왕 자리를 양보하려 싸우다 떡을 물어 잇자국 많은 사람을 왕 삼기로 했다. 이를 이윤기는 (쇠 다루는) 역량으로, 이어령은 덕으로 해석했다. 대권을 향해 덤벼드는 이들은 과연 역량과 덕을 두루 갖추고 있을까. 허언을 남발하기보다 떡부터 물어 볼 일이다.

이권우<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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