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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시장 개방 오해와 진실] 개방 미룰수록 충격은 더 커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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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92년 12월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쌀시장 개방만은 막겠다"고 공약했다. 쌀시장이 열리면 외국 쌀이 물밀 듯이 들어와 국내 농업이 완전히 끝장난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했다. 93년 협상에 나선 우리 대표단은 이 같은 국내 여론에 짓눌려 '쌀 개방은 안 된다'는 조건을 지상목표로 삼았다.

정부는 20일 10년 만에 쌀시장 개방 협상을 다시 시작한다고 밝혔다. 우루과이라운드(UR) 협정서에 올해 협상을 하도록 정해져 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길이다. 그러나 10년 전과 사정이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국내에서는 여전히 '개방(관세화)이냐''개방 연기(관세화 유예)냐'를 놓고 아직도 논란 중이다. 10년 전 쌀 개방을 미룬 것은 농업에 대한 충격을 완화하겠다는 것이었는데 마치 '개방 유예'가 목표처럼 돼버렸다.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FTA) 하나 처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쌀시장 개방은 말이나 꺼내겠느냐는 자조적인 얘기도 나온다. 문제는 쌀시장 개방문제를 제대로 보지 않으면 해법도 없다는 것이다.

◇실익을 따지자=시장개방을 미루면 당장 농민들은 한숨을 돌릴 수 있다. 그러나 시장개방은 한시적이다. 언젠가는 다시 협상을 해야 하고 시장개방을 미루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일 가능성이 크다. 전 세계에서 한국과 필리핀만이 쌀시장을 개방하지 않고 있다.

또 개방 유예는 '모든 나라가 동등한 조건에서 교역한다'는 세계무역기구(WTO)의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의무적으로 일정량을 수입하는 방식으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이미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개방이 유예되는 동안에도 우리나라가 수입 쌀에 적용할 수 있는 관세율은 계속 낮아지고 있다. 개방을 미룰수록 개방의 충격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농촌경제연구원 서진교 부연구위원은 "개방을 미루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유예에 대한 대가가 개방했을 때보다 유리한지 나쁜지를 따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최낙균 무역투자 정책실장은 "정치권에서 수매가 인하를 반대하는 바람에 일본은 지난 10년간 쌀가격이 25% 떨어진 데 비해 우리는 오히려 올랐다"며 "정치권이 무리한 요구로 협상을 왜곡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외국의 움직임=협상 개시 후 90일 내에 한국에 쌀을 수출할 의사가 있는 국가들은 WTO에 통보해야 한다. 그렇다면 미국은 무조건 쌀시장 개방을 주장할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미국은 중국 쌀로 인해 국제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다. 지난해 일본의 민간기업이 수입한 저율수입물량의 70%가 중국산이었다. 과거에는 미국산이 전체의 50%를 차지했다. 중국 쌀은 가격이 여전히 싼 반면 미국 쌀과의 품질 차이는 크게 줄었다.

미국으로선 한국이 시장을 개방하느냐 마느냐보다는 지금 수출하는 물량만큼 안정적으로 수출하는 데 더 큰 중점을 두고 있다. 외교통상부 안총기 세계무역기구 과장은 "미국은 최소시장접근 물량을 현재 4%에서 배로 올리고 이렇게 수입된 물량도 국내 수퍼마켓에서 팔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중국은 완전한 시장개방을 주장할 것으로 보인다. 싼 가격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점을 이용해 한국에 대한 수출을 크게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태국을 비롯한 농산물을 수출하는 개발도상국들은 이번 기회를 국내 농산물 시장에 본격 진출하는 계기로 삼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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