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조상 싸움 시킨 한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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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결국은 여론몰이식 인기투표의 장(場)이 되고 말았다. 한국은행이 고액권(5만원.10만원)에 들어갈 인물초상 10명을 선정한 뒤 한은 인터넷 게시판은 세(勢) 대결의 전투장으로 변질돼 버렸다.

7일 개설한 한은 게시판에는 여론 수렴 마지막 날인 21일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전날까지 2만2000여 건이었던 게시물이 하루 새 2만6000건이 불어난 것이다.

한은 관계자는 "그 상당수가 특정 인물과 관계된 단체나 모임이 의도적으로 올린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유관순 지지자들이 무더기로 추천 글을 올리자 이에 질세라 신사임당 지지자들이 조직적으로 글을 남겼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 없이 특정인을 지지한다는 제목만 달려 있는 경우가 유난히 많은 것도 이 때문으로 풀이된다. 또 게시자의 이름만 다를 뿐 똑같은 제목과 내용의 글도 수십 건씩 오르기도 했다.

당초 한은은 "게시판은 후보 10명이 화폐 초상인물로 적절한지와 다른 인물을 추천하는 기회로 기능할 것"이라고 했지만 이에 부합하는 글은 거의 찾기가 힘들 정도다.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한은은 초상인물 결정에 게시판을 활용하겠다고 이미 밝혔다. 따라서 "게시판에 가장 많이 거론된 인물을 배제한 것은 부당하다"고 반박하면 한은은 더 난처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한은 관계자는 "특정 단체들이 조직적으로 올린 것으로 추정되는 '몰표' 성격의 글은 추후 심의 과정에서 배제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변질된 상황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한은은 '남 탓'할 일이 아니다. 원인은 스스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눈치 살피기에 급급한 자신에게 있다. 한은은 게시판 개설 이전에 1000명에 대한 여론조사와 150명의 전문가 조사까지 했다. 그런데도 여론을 더 들어야 되겠다며 게시판을 개설했다. 모양새는 그럴 듯하지만 한은의 '면피주의'가 결국 막판 혼란을 자초한 셈이다.

연세대 사학과 임성모 교수는 "국가의 미래 비전을 상징하는 화폐 초상인물을 인기투표 방식으로 결정한다는 것 자체가 황당한 일"이라고 말했다.

김준현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