왈순아지매(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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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50년대말 당시 대학 경제학과 학생이었던 정운경은 작가 최일남이 편집장으로 있던 여원사로부터 가정만화 연재 의뢰를 받는다. 동가식 서가숙 시절의 고달픈 대학생에게 연재 의뢰는 생계와 동시에 만화가로서의 장래를 보장하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그는 「고바우」와 「두꺼비」처럼 평생을 작가의 분신으로 살아갈 주인공을 만들기 위해 밤낮으로 서울시내를 휘몰아다녔다. 어떤 모습,어떤 성격의 인물을 만들어낼 것인가. 두어달 헤매다니다 어느날 지친 몸으로 사촌형 집을 찾은 그는 월선이라는 이름의 시골 여인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툽상한 어깨에 굵직한 허리,남자처럼 왕왕거리는 말투. 사촌 형수와 마주 앉아 한참 신세 한탄을 늘어놓는 수더분한 시골 아낙을 처음 보는 순간」 그는 전광석화처럼 바로 저 인물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이후 35년간 「왈순아지매」는 정운경화백의 분신이 되어 때로는 서민의 애환을 대변하고,때로는 군사독재의 살벌한 분위기에 맞서 바른소리를 쏘아대는 특유의 풍자와 해학을 자랑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원래 이 땅에 시사만화란 형식이 도입된게 1909년 6월2일의 대한민보 창간때 관제 이도영이 그린 「삽화」부터였다. 한장짜리 만평이 일제 침략상을 비꼬는 수가 많아서 대한민보는 1년을 넘기지 못하고 폐간된다. 미국 템플대학의 언론학 교수인 존 렌튼이 분석하고 있듯이 한국의 시사만화는 체제와의 저항 때문에 빛을 발했고 막힌 언론의 숨통을 여는 기능을 해왔다. 군사독재기간중 언론의 숨통이 조금이나마 살아있었다면 이 네칸짜리 공간이었고,이 공간을 메우는 만화가들의 작업은 그만큼 고통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간신히 원고를 넘기고 밥숟가락을 뜨려할 때면 영락없이 「모처」에서 전화를 걸어 압력을 넣으니 만성 위장병에 시달릴 때도 있었다. 기관원이 상주하던 시절에는 원고를 도둑처럼 넘기고 뒷문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실제로 모처에 끌려가 곤욕을 당한 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독자야 슬쩍 훑어보고 빙긋 웃으면 끝날 네칸자리 공간이지만 화백들은 아이디어 발굴을 위해 밤잠을 설치고 머리를 쥐어짜며 피를 말리는 고통을 감수해야만 한다. 『어느날 밤이면 왈순아지매가 아니라 나 자신이 만화의 네칸속에 들어가 허둥대는 모습을 본다』고 정 화백이 고백할 만큼 고통스럽고 고뇌에 찬 작업이기도 하다. 이 「왈순아지매」가 본지에 연재된지 20년,이제 6천회를 돌파했다. 왈순아지매여 건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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