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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비꼬는 ‘콩가루 가족’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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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호 12면

지구 상에서 가장 유명한 가족이 TV에서 뛰쳐나와 스크린마저 접수하려 나섰다. 미국 애니메이션 시트콤 ‘심슨가족(The Simpsons)’의 영화판 ‘심슨가족, 더 무비’가 개봉 2주 만에 3억40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니, 다른 나라들은 이미 이 가족의 매력에 넘어간 것 같다.

TV 애니메이션 ‘심슨가족’의 극장판 ‘심슨가족, 더 무비’

20세기 대중문화를 지배한 가족
‘심슨가족’은 많은 비평가가 가장 성공적이고 영향력 있는 TV 프로로 꼽는 시리즈물이다. ‘타임’지는 1999년 송년호에서 ‘심슨가족’을 20세기 최고의 TV 시리즈로 선정했고, 말썽쟁이 아들 바트를 허구적 인물로는 유일하게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으로 꼽았다. 만화가 매트 그로닝과 제작자 제임스 브룩스 콤비에 의해 탄생한 이 시리즈는 1989년 처음 폭스 채널을 통해 전파를 탄 이래 쟁쟁한 시청률을 자랑하며 18년째 미 전역에 방송되고 있다.
‘심슨가족’은 방영 초부터 미국 대중문화의 최전선이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꿈과 판타지로 전 세계를 지배해 왔다면, ‘심슨가족’은 전복적 유머와 비판적 풍자로 시청자를 열광시켜 왔다. 호머와 마지 부부, 세 자녀인 바트와 리사, 매기 모두 문화적 아이콘이 됐다. 특히 호머 캐릭터는 현대 대중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심슨처럼 웃겨봐
영화 ‘심슨가족, 더 무비’는 TV 시리즈에 비해 스케일이 더 커졌지만, 콩가루 가족의 무정부적 소동극이라는 시리즈의 기본 틀은 그대로 가져온다. 영화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호머가 사고를 쳐 스프링필드가 파멸의 위기에 처하지만 바트와 힘을 합쳐 고향을 구한다. 이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숲보다는 나무를 봐야 한다. 각 장면마다 심슨표 유머가 톡톡 튄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새끼 돼지를 끼고 사는 호머가 갑자기 돼지를 거꾸로 들어 올려 천장을 걷게 하면서 영화 ‘스파이더맨’ 주제음악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스파이더 피그, 스파이더 피그……” 천장에는 돼지 발자국이 점점이 찍힌다.

*도피 중인 심슨 가족을 경찰 순찰차가 뒤쫓는다. 순찰차에서 내린 경찰관 2명은 심슨 가족을 체포하는 대신 서로 열렬히 포옹한 뒤 뒤편의 모텔로 들어간다. 경찰들은 마침 근무시간 중 러브호텔을 찾은 동성애자 커플이었던 것이다.
*한 장면이 끝나면서 ‘다음에 계속(To be continued)’ 자막이 나타난다. 그러나 곧바로 ‘바로 지금(Immediately)’ 자막이 나온다.
이러한 전복적 유머와 기상천외한 패러디, 자기반영적 풍자는 이 영화의 웃음의 원천이다. 환경재난을 둘러싸고 정부의 관료주의와 비밀주의, 대중의 무관심과 충동적 반응이 두루 조롱거리가 된다.

사고 치는 남자들, 수습하는 여자들
물론 가장 큰 웃음은 개성적인 심슨 가족 5인방에게서 나온다. 10세 아들 바트는 도덕과 현실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하는 막가파 문제아다. 철학자 질 들뢰즈가 말하는 욕망에 따라 사는 인간 ‘스키조(schizo)’ 같다. 대머리 배불뚝이 호머도 무책임하게 쾌락을 좇는 점에서는 같지만, 바트보다 훨씬 세속적이다. 맥주와 핫도그, 돈에 사족을 못 쓴다. 그의 충동적이고 대책 없는 행동, 한 자릿수 잔머리에서 나오는 어이없는 실수는 예측을 불허한다. 영화에선 공짜 도넛을 얻으려다 환경재난을 유발하고 수배인물 신세가 된다.

이런 가운데 희망의 횃불을 치켜드는 유일한 인물은 조숙한 딸 리사다. 심각한 사회문제를 떠안고 사람들을 일깨우려 하지만 누구도 동참하지 않는다. 영화에선 아일랜드에서 온 미소년이 리사의 편에 선다. 파란 벌집머리를 자랑하는 마지는 천방지축 호머와 바트를 감싸 안으며 가족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다. 그런 마지도 영화에선 자기만을 생각하며 안일에 빠져 있는 호머를 떠나 스프링필드를 구하러 나선다. 남성이 저지르고 여성이 수습하는 시리즈의 고전적 패턴이 영화에서도 반복된다. 마지막으로 항상 공갈 젖꼭지를 물고 다니는 매기가 있다. 영화 마지막에서 처음으로 말을 한다.

,b>스프링필드, 황폐한 현대사회의 축소판
표면상의 유머를 걷어내고 보면 ‘심슨가족’의 세계는 매우 암울한 세계다. 대다수 인물의 삶은 불모의 사막처럼 황폐하다. 이기적 물질주의에 사로잡혀 서로를 속이고 조롱한다. 마음을 연 소통은 간데없고 미래에 대한 희망도 찾아볼 수 없다. 호머의 탐식은 이런 삶의 황폐함을 드러내는 대표적 기호다. 스프링필드의 환경재난도 시민들이 미래를 믿지 않고 현재의 안일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로 그려진다. 세상에서 진리도 신도 사라졌고, 남은 것은 정부 관료기구와 대기업으로 대표되는 사악한 시스템과, 욕심 많고 생각 없는 바보 호머로 대표되는 대중뿐인 것처럼 보인다.

영화판 ‘심슨가족’은 미국 대중문화의 힘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86분 내내 현대사회와 문화에 대한 발작적인 패러디와 무차별적 풍자를 기관총탄처럼 난사하며 웃음을 선사할 수 있는 것이 미국 팝문화 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
그러나 이 영화가 우리 관객들과 궁합이 맞을지는 미지수다. 우리나라에서 ‘심슨가족’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수년 전 MBC-TV를 통해 방영되었을 때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과연 ‘심슨가족’은 한국에서 통할까. 이제는 우리가 ‘심슨가족’의 시니컬한 유머를 더 잘 받아들일까.
이 영화는 우리가 얼마나 미국을 닮아가는지를 가늠하는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 역할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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