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비서실>163.全씨 임기직전 군부 전격개편(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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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9.9인맥은 자신들이 같은 하나회지만 全대통령 아래서「물을 먹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9공수여단의 첫 참모장이었던 李鎭三은 동기생중 장군진급을 제일 빨리 했지만 중장은 高明昇보다 1년 늦게 달았다.盧당선자의 보안사령관 시절 비서실 장을 했던 安秉浩(20기)는 장군 진급에서 1년 늦었다.하나회 정통파가 아닌 방계였던 安의 진급 1차연도 탈락이유가 어떻든 그가 모셨던 盧씨때문에 불이익을 받았다는 얘기가 있었다.
12.12때 9사단29연대장으로 서울로 출동했던 李弼燮은 81년1월 준장진급에서 밀렸다.물론 李弼燮은 대령에 올라갈 때 1년 늦어서 장군도 늦었던 것이었다.그러나 韓美간 작전권논쟁을야기했던 29연대를 지휘한 점과 동기생중 무려 7명이나 준장진급을 했음에도 탈락한 것은 논란거리로 삼을만 했다.그런 점에서보면 盧泰愚소장의 9사단 이동을 全대통령은 크게 의미부여를 안했다고 할 수 있다.이미 朴熙道의 1공수여단이 육본과 국방부를평정한 뒤에 들어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全대통령의 심리 저변엔 확실히『내가 너를 후계자로 임명하고 선거때 정치자금을 끌어모아 당선시켜주지 않았냐』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盧당선자는 달랐다.선거자금을 얻어 썼지만 全대통령의 인기없음으로 해서 고생끝에 자기 힘으로 金泳三.金大中후보를눌렀다고 생각했다.그 과정에서 全대통령과 다르다는 우월감이 생겼고 그런 심리상태가 盧당선자로 하여금 군인사를 더 욱 불만스럽게 만들었다.두사람은 당선의 열매를 맛보는 순간부터 애증의 갈림길에 섰던 것이었다.권력의 속성은 그런 것이었다.
결국 정권이 바뀐뒤 全대통령의 군인사 작품은 차례차례 구겨지고 말았다.88년6월 朴熙道총장은 임기6개월을 남긴채 2군사령관 李鍾九(14기)에게 자리를 넘겼다.李鍾九는 全대통령의 가지치기 덕분에 다음 총장자리에 대기하고 있었으나 어 느사이「盧대통령 사람」으로 변해있었다.『全대통령은 자신이 어려울때 충성할것으로 믿었지만 세상인심은 변하고 있었다.권력무상은 군에서도 시작되었다.』(Q씨) 국가원로자문회의는 옥상옥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법적장치를 마련했지만 여론의 집중적 화살을 맞았다.全대통령은 4월13일 원로회의 의장.민정당명예총재직등 모든 공직사퇴를 선언했다.
88년 12월 全씨가 백담사로 유배된 직후 崔枰旭보안사령관은연희동을 수시로 들락거렸다는 과장된 경찰첩보로 밀려나고 곧 옷을 벗고 말았다.보안사령관이 대장진급을 못하고 군을 떠난 것은70년대 3군보안부대가 통합돼 국군보안사령부로 발족한후 처음이었다.그리고 교육사령관 후임에 金振永수방사령관이 갔다.이 인사는 전임자의 인맥을 절단하는 盧대통령의 의지가 깊게 배어있었다. 군의 전면개편으로 하나회는 분열되었고 5,6共간에 증오의 골은 깊어갔다.閔丙敦은 육사교장으로 졸업식장에서 盧대통령을 빗대 공격한뒤 추방됐다.
이로써 全대통령 퇴임후의 모든 구상은 흐트러지고 말았다.지금도 87년 12월의 군인사를 놓고 갈등의 씨앗을 서로 상대방이뿌렸다는 공방을 양측은 하고 있다.
〈朴普均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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