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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찾기>국제화시대 사는 한국사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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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현순씨,팩시밀리 쓸 수 있겠지요?』 나는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서둘러 작성한 기사 송고를 위해 팩시밀리 쪽으로 다가가며물었다. 현순씨는 고개를 번쩍 들어 두 눈을 뽀꼼하게 떠보이기만 했다.
『서비스맨이 아직 오지 않았단 말입니까?』 현순씨는 웬걸요,하는 눈빛이 되어 고개만 살래살래 내저어보인 다음 전화기부터 당겼다.또 아프터서비스에 전화를 걸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마감 시간에 맞춰 기사를 보내야만 했다.나는또 옆방으로 달려갔다.나카지마상이 반색하며 내 손에 들고 있는종이부터 보았다.
『아직입니까?』나카지마상은 위로하는 낯빛이 되어 대뜸 팩시밀리실로 나를 안내했다.『서울에서는 서울법을 익혀야 합니다.』서울 주재 경력으로 보아 나보다 훨씬 선배인 나카지마상은 내내 그렇게 나를 위로하는 낯빛인 채였다.
들은 이야기지만,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인 멕시코에서는「마니야나」라는 말이 유행한다고 한다.「마니야나」는 정확하게는「내일」을 뜻하지만,그보다 더 보편적인 의미는「막연한미래」였다.이를테면 관청에 가서「마니야나」라는 소리를 들으면 그저 한세월하고 기다려야만 한다는 거였다.
국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알았습니다』하면 그 다음에는 한국식 표현대로 꿩 구어먹은 소식이기 일쑤였다.이럴 경우 안달해 속터지면 이쪽만 손해였다.
나카지마상의 충고대로 서울법을 익힐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남의 회사 팩시밀리를 빌려 기사를 동경 본사에 보내고난다음 내 사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아 비로소 서울에서 발행되는오늘자 신문들을 펼쳐보기 시작했다.
요즘 서울의 모든 언어는 세계화.국제화.개방화로 집약된다.
아마도 쌀개방 태풍으로 뭇매를 맞고 있던 정부에서 그 뭇매를우선 피해보자는 심정으로 급히 들이댔던 방패가 그거였을는지도 모른다.그때부터 서울은 내내 세계화.국제화.개방화의 깃발이 줄기차게 펄럭거리고 있는 중이었다.내가 그런 깃발 이나,그런 깃발을 애써 휘두르는 사람들에 대해 가볍게나마 민망스러움을 느끼는 것은 일을 절대로 되지 않도록 만들어 놓고는 안간힘만 쓰고있는듯한 서울 사람들에 대한 민망스러움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바로 조금 전,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팩시밀리만 해도 그랬다.고장은 그저께였다.그 뒤,우리 현순씨는 몇차례나 전화를 했다.그때마다 그쪽의 답은『예,알았습니다』였다.그뿐이었다.그 다음에 전화를 걸면 또 이쪽의 전화번호와 상호를 묻 고는『예,알았습니다』하는 거였다.동경이었다면 거의 즉각 이었다.거의 즉각과『예,알았습니다』의 되풀이와 도대체 어떻게 경쟁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서울에 펄럭거리고 있는 또 하나의 깃발인「한국방문의 해」만 해도 마찬가지였다.보여줄 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보여줄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그러면서도 줄기차게 외쳐대는 것은『한국방문의 해』였다.
서울에 온 지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가지만 한국은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였다.나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이 나라에 대해 묘한 느낌에 잠깐 잠겨보게된 것은 마지막으로 집어든 신문에서 였다.
느 기자가 쓴 글이었다.
제목은『日 기자들의 妄言』이었다.
우리가 무슨 망언을 했다는 말인가.나는 의아스러워 하며 그 다음을 들여다보았다.며칠 전 서울시장이 서울 정도(定都)6백주년 관련 기자회견 석상에서 일본 기자들이 던진 질문에 대한 거였다. 『서울 정도 6백년중 70년이라면 결코 짧은 역사가 아니다.그만큼 긴 역사를 가진 조선총독부 건물을 계획적이고 의도적으로 없애려는 것은 일종의 역사 파괴행위가 아닌가?』 『조선총독부 철거가 역사적으론 이해되지만 건물 자체는 훌륭한데 해체하는 것은 아깝지 않은가?』 이런 질문들을 인용한 다음 기자는이렇게 적어두고 있었다.
-일본 기자들은 국립중앙박물관이라는 이 건물의 현재 이름을 모르는지,아니면 알면서도 무시하려는 것인지 시종 조선총독부라는명칭을 사용했다.한 기자는 당당하게「조선총독부 철거에 대해 질문하겠다」고 말해 우리측 관계자들의 낯을 붉히게 했다.일본 기자들의 이런 행태는 일본이 여전히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반성없이 그들의 과거 잣대만으로 오늘의 한일관계를 보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는 느낌이다-.
그쯤 읽어내려가고보니까「망언」이라는 표현이 그다지 틀린 것은아닐 듯했다.그러나 결코「일부러 무시」하려던 것은 아니었다.저절로 였다고나 할까.이야기를 하다보니 그리 된 것뿐이었다.
야릇해 해야만 할 일이었다.
서울에 처음 올때만 해도 나는 가해자의 죄책감이니 하는 거북스러움 같은게 있었다.그러나 막상 서울에 도착하여 하루하루 달력장을 넘겨가면서 나는 실제에 있어서 편안한 쪽이었다.거북해 하는 것은 오히려 피해자가 되는 셈인 한국사람 쪽 이었다.한국사람들은 주눅을 느끼고 있었고,그러다보니 일본인을 대할 때 경직되어 겉 다르고 속 다른 표현을 하기 일쑤였다.
내가 한국사람의 그런 표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내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에서 였다.나는 어린시절 주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얻어터지고 다니는 쪽이었다.그런데 나를 괴롭힌 녀석들은 언제나 당당했다.맞닥뜨렸을 때 비실비실 피하는 것은 언제나나였다.어느 날이었던가.나는 오기를 머금고 마음 속으로 칼을 갈아 나를 괴롭히던 그 녀석들을 마침내 무릎 꿇리고야 말았다.
그 다음부터는 서로 맞닥뜨렸을 때 비실비실 피한 것은 녀석들이되었다. 그런데 한국사람은 어찌 된 셈인지,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오기를 머금는 듯한 빛도 비치지 않았고,더구나 칼 가는 소리 같은 것은 울리지도 않았다.그저 언제나 편안했다.마냥 편안한 표정인 채로,문민시대니 세계화니 한국방문의 해니 하는, 실천으로는 이어지지도 않는 이런저런 구호들이나 만들어 펄럭거리고있는 듯했다.마치 그런 것을 일삼아 즐기고 있는듯해 보이기도 했다. 내가 오랜만에 일찌거니 퇴근하여 아파트에 돌아가 맞닥뜨린 풍경도 마찬가지였다.또 하나의 편안한「마니야나」가 거기에 널브러져 있었다.나와 계약동거를 하고 있는 은숙씨는 내가 들어서자마자 동동거리기부터 했다.냉장고에서 이제 아예 물방 울이 뚝뚝 떨어진다는 거였다.언제나 섹시한 은숙씨가 그렇게 동동거리니까 더욱더 섹시해보여 좋기는 했지만,사연만은 섹시한 것과는 빛깔이 달랐다.
***새 로 산 냉장고를 들여다놓은 지 열시간쯤 지난 뒤에 전기 스위치를 넣고 돌렸더니 조금 뒤에 냉장고 벽에 이슬이 맺혔다.은숙씨는 대리점에 전화하였다.대리점에서는 자기네는 파는 일만 하니까 그런 것은 아프터서비스센터에 이야기하라면서 전화 번호를 알려주었다.은숙씨는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쫑알거리면서도 아프터서비스센터에 전화했다.그때 은숙씨가 들은 저쪽의 대꾸도「알았습니다」였다.몇번을 전화해도 마찬가지였다.그러기를 어느덧 닷새째였다.동동거리는 것은 은숙씨였고 저쪽은 그저편안하게「알았습니다」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은숙씨가 동동거린 덕분인가.
내가 샤워를 하고 나오자 은숙씨가 팔딱팔딱 뛰고 있었다.
『드디어 온데요.조금 전에 전화가 왔었어요.』 은숙씨는 기뻐못견뎌 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서울에서 기뻐 못견뎌 하게 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구나 하고 생각했다.그 다음에 이어진 것은 정상일과 시간이 끝났을 텐데도 서비스를 하러 돌아다니는 그 사람에 대한 경외감이었다.이어지는 또 하나의 느낌이 있었다.아프터서비스 를 필요로 하는 일이 많을 만큼 불량 제품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아프터서비스가 늦어질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하는 거였다.
그다지 오래지 않아서 현관문에서 딩동 소리가 울렸다.은숙씨는깜짝 반색하여 히프를 야릇하게 뒤틀며 달려나갔다.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내가 돌아올 때도 저 여자가 저토록 반색한 적이있던가,하고 생각해보았다.
미식축구 선수같은 거친 걸음걸이로 들어온 서비스맨은 냉장고를열어본 다음에 은숙씨를 향해 대뜸『망치 같은 거 있습니까』하고물었다.나는 잠자코 내 휴대용 공구 상자에서 조그만 망치를 꺼내 주었다.서비스맨은 냉장고문을 열고 망치끝으 로 냉장고 한쪽벽을 톡톡톡 때렸다.무엇을 하는 것일까.참 신기한 수리법도 있다 생각하며,나는 가만히 지켜보았다.서비스맨은 벽 한쪽에다 살짝 금이 가도록 매우 기교적으로 상처를 내고 있었다.
『고치려면 복잡하고,그렇다고 서비스센터에 가져가면 사모님도 귀찮으실 테니까 아예 수리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드리는 겁니다.이러면 대리점에서 바꿔줄 수밖에 없거든요.수리는 아프터서비스에서 하지만,바꿔주는 건 대리점 일이니까요.』 서비스맨은 은숙씨와 나를 번갈아 보며 선심이라도 쓰는 듯한 표정을 지은 다음에 대리점에 전화를 걸어,「냉장고를 바꿔야겠는데요,안에 클렉이 갔습니다」하고 말했다.
『언제 바꿔준데요?』 은숙씨는 전화를 끊고 돌아서는 그를 향해 물었다.
『알았다고 했으니까 기다려보세요.』 서비스맨은 가방에서 수리전표를 꺼내 은숙씨에게 도장을 찍어달라 한 다음에 곧,역시 미식축구 선수같은 걸음걸이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뒤를 노려보듯하고 있던 은숙씨가 팽 소리가 나게 몸을 돌리면서 외쳤다.
『하여튼 한국사람은 할 수 없어요.헹!』 나는 괜히 민망하여눈길을 슬그머니 창밖으로 돌려버렸다.
바깥 서울의 하늘은 캄캄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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