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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산다>11.74년 양주 정착 前아나운서 정인희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前기독교방송 아나운서 鄭仁熙씨(68)의 집마당에서 모닥불에 둘러앉아 모카커피를 마시는 일은 유쾌했다.
집뒤로 병풍처럼 늘어선 상수리나무.떡갈나무들이 겨울의 을씨년스러움을 온몸으로 풀어내고 있었지만 낮은 진달래 담장에서는 왠지 봄이 톡톡 터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70년대까지 전파를 탔던 목소리가 여전히 활기롭고 생생한 鄭씨는「떨치기 힘든 방송의 마력」을 적당선에서 스스로 잠재운채 지난 74년이후 둥지를 튼곳은 경기도양주군주내면남방리407.
의정부에서 동두천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신탄리를 오가는 기찻길을 건너자 방앗간.산낙지집.통닭집들이 마치 연극무대의 세트처럼늘어선 마을 입구가 나타났다.
그곳에서 조금 들어가자 별안간 좁고 울퉁불퉁한 숲길이 다른 세계로 안내하듯 나타났고 저만치「하얀집」에서는 손님을 맞기위해피워놓은 모닥불이 활활 타올랐다.
가꾸지 않은 그의 집마당에는 자연.사람.동물을 닮은 수석 수백점이 되는대로 널려 있었고 악착같이 짖어대는 발바리가 온동네여섯가구에 손님이 왔음을 알려주었다.
모닥불에 마른가지들을 던져넣고 따끈한 커피를 나눠마시면서 자연이 마음을 열게 한 탓일까,일행들은 하늘로 얼굴을 향한채 자꾸 웃게 됐다.
『논두렁에서 못밥을 먹다 1시간여만에 광화문으로 달려나가 친구들을 만나고 음악회라도 다녀오면 감사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지요.』 서울신학대를 졸업하고 군복무중 대위로 전역한 후 20년동안 방송에서「명상의 시간」「명사탐방」「신은 죽었는가」등의 프로를 담당했던 그는 50을 바라보면서 그리던 자연의 품속에 자신을 내맡겼다.
어릴 때부터 꿈꾸던 아나운서를 하면서도 자연속에 있기를 갈망했던 그는 시간이 날때마다 자전거를 타고 평소 산행하면서 봐두었던 곳들을 답사하고 다녔다.
그리하기를 3년,그는 그린벨트로 묶여있는 현재의 이곳을 찾아냈고 평당 1천여원씩 주고 논밭.집터등 모두 2천여평을 사들였다. 그에게 작용했던 선택요건은 우선 자연이 살아있으면서 서울에서 늦은 저녁에 음악회 감상 등을 끝내고 1시간여만에 집으로돌아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는 지금도 하루 2~3시간씩 모차르트나 베토벤에 심취할 정도로 클래식 음악에 빠져 있다.
지금도 주변경관이 별로 변하지는 않았으나 당시에는 전깃불도 없었고 앞산에는 노루가 뛰어놀았다고 했다.
수유동에 살던 마당 60평짜리 기와집을 4백만원에,코로나승용차와 당시 비싼값을 자랑했던「백색전화」등을 팔아 긁어모은 돈이모두 8백만원.
중.고생이었던 4男이 줄줄이 달려있었던 그가 믿었던 것은 지금은 3천만원쯤 될거라는 여유자금 약 3백만원.
아내(이영선씨.61)와 아이들의 반대에 부닥쳐 그는 한동안『공처가가 돼야했다』고 웃었다.
마당에 딸려있는 논에서 한해 평균 쌀 10가마정도를 수확하고밭에서는 콩네말,깨 한말및 각종 고구마.감자.파.딸기등 무공해채소등을 부식으로 생산,이럭저럭 생활이 가능했다.
저마다 자연에의 삶을 동경하는 이제 판도는 역전됐고 그는 식구들에게 요즘 큰소리치며 산다고 했다.
작은 방이 5개인 40평짜리 집에는 부인,김포에 직장이 있는큰아들내외와 손자,강아지 두마리가 함께 살고 있다.방에는 마당에서 꺾어놓은 진달래가 분홍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는 직장을 그만둔 지난 20년간『사람답게 살아왔다』고 전했다. 제철에는 농사짓고 남은 시간에는 동호회사람들과 산행과 수석채집을 위해 산과 내를 누볐다.음악감상과 함께 낚시.독서도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취미다.자동차로 거리가 좁혀진 요즘에는 특히 언제고 원하면 도시 한복판에서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고 싫으면 며칠이고 두문불출할 수 있는 그의 삶이야말로 지극히「사치스러운」것이라고 할 밖에….
아침마다 아내와 야산을 한바퀴 뛰며 떠오르는 태양을 감상한다는 그는『나는 밤낮「고맙습니다」해야 할 일밖에는 없지요』라고 했다. 이런 고마움은「자연스럽게 살기를 원했던」그가 끈끈한 욕심들을 버리고 失機하지 않은채 그 삶을 실천에 옮긴데 대한 보상이다. 〈高惠蓮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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