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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음부도 예상한 인출사기극/「신탁은」사건 어떻게 터졌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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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장씨,전 지점장 하수인으로 부려/“곧 도장 찍어준다”에 쉽게 넘어가
「큰 예금에 약한」 은행과 금융기관들이 왕년의 큰손 장영자씨에게 어이없게 놀아났다.
장씨는 10년의 옥살이 끝에 92년 3월 가석방된뒤 곳곳에 「의욕적인 사업구상」을 피력했다. 장씨는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별장(지금은 장씨 소유가 아니며 경매처분중)에 그전부터 알고 지내던 인사들을 초청해 모임을 갖기도 했다.
장씨는 기회있을 때마다 제주도 성읍목장 2백90만평 등 전국의 2천억원대 부동산을 기반으로 청소년 휴양시설·레저타운·골프장 등 새 사업을 벌이겠다고 이야기하고 다녔다.
서울신탁은행에 따르면 전 압구정동지점장 김칠성씨가 장씨를 다시 만난 것은 92년 11월. 장씨가 이곳을 찾아와 예금을 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서울신탁은행(행장 김준협)은 지점장들에게 어떤 예금이든 좋으니 많이 유치하도록 독려했는데,예금유치액 범위안에서 지점장이 대출해 줄 수 있도록 특별배려를 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 장씨가 찾아와 예금을 해주니 당시 김칠성지점장으로선 그리 반가울 수가 없었다. 김씨는 장씨를 잘 대접하면서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김씨는 지난해 4월28일 D공영에 대한 부당대출 건으로 사실상 아무런 할 일이 없는 관리부 관리역으로 발령났다. 그래도 장씨와 김씨와의 관계는 이어졌다.
그러던중 자신이 소공동지점 차장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업가 강원철씨가 지난해 9월 갖고 있던 유평상사를 사업이 부진해 폐업하자 이를 장씨에게 소개했다.
당시는 실명제가 전격적으로 시행된 와중이라서 「구린 돈」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사실상 이름만 있는 법인들이 인수해 합법적으로 실명화를 꾀하던 시기였다. 장씨는 거저 이 회사를 인수해 자금조달과 융통창구로 이용했는데 대리인으로 남편 이철희씨와 알고 지내는 최영희씨를 대표로,김칠성씨를 이사로 앉혔다.
유평상사는 매출규모가 92년에 2천3백만원,92년 상반기에 겨우 7백만원인 보잘 것 없는 회사였다. 그런데 장씨가 인수한 직후인 작년 10월5일부터 부도나기 직전인 12월10일까지 두달여동안 서울신탁은행 압구정지점에 개설된 당좌계좌를 통해 결제된 어음이 무려 30여억원에 이를 정도였다.
장씨는 실명제로 막힌 자금의 숨통을 트기 위한 또다른 방안으로 주식투자를 택했다. 이 창구는 상업증권 S모 상무가 맡아 했으며,이 때문에 상업증권의 전신인 옛 서울투자금융 멤버들이 장씨를 돕는 또다른 대열을 이뤘다.
문제는 장씨가 사업자금 마련을 위해 팔려던 부산 범일동 땅에 근저당을 잡아놓은 조흥은행에서 풀어주지 않아 팔기 어렵게 되면서 자금사정이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무렵 장씨는 김씨와 함께 이번 예금인출사고를 치밀하게 사전계획한 것으로 보이며,김씨로 하여금 전 직장인 압구정동 지점에서 사기행각을 벌이도록 한 것이다.
이때 걸려든 사람이 평소 가깝게 지내던 하정림씨(58·여·사채업자)였다. 하씨는 사업을 같이하자는 장씨를 믿고서 지난해 10월25일 오후 4시30분 서울신탁은행 압구정지점에 직접 나타나 10억원의 저축예금을 들었으며,입금했다는 증거로 통장만을 장씨측에 건네줬다.
그러자 입금 한시간뒤 김칠성씨가 하씨의 통장을 들고 찾아와 『곧 도장을 갖고 와서 정식으로 서류처리해 줄테니 돈을 내달라』고 요청,돈을 빼냈다. 김씨는 이날 오전 후임 지점장인 김두한씨에게 『오늘(장씨의) 돈이 들어온다』고 미리 귀띔해 믿도록 했다.
인출된 예금중 2억1천만원은 포스 시스팀에 송금됐으며,수표 7억원은 유평상사 어음 50억원을 할인해준 삼보신용금고로 넘어갔다.
이튿날인 10월26일 오전 11시쯤에는 하씨의 남편 원모씨가 나타나 20억원의 보통예금을 들었으며,이날 오후 4시쯤 역시 김칠성씨가 통장을 들고 나타나 예금을 빼냈다. 이 돈은 장씨의 사위 김주승씨가 운영하는 이벤트 꼬레로 송금됐다.
결국 장씨는 유평상사 발행어음의 부도가 예상되는 등 문제가 생길 것 같자 하씨의 돈을 빼내 우선 급한대로 자신이 돈을 끌어 쓴 포스시스팀,삼보상호신용금고,이벤트 꼬레 등에 보내 급한 불을 끄려고 한 것이다. 은행은 도장없이 통장만 달랑 들고와서 당일 예금한 돈을 찾아가는 비정상적인 거래에도 뭐 믿을게 있다고 선뜻 돈을 내준 것이다.
결국 장씨는 왕년의 명성(?)에 걸맞지 않는 치졸한 사기극을 벌인 셈인데,은행원 생활을 30년 가까이 한 「행원의 꽃」 지점장들이 어처구니 없게 당한 셈이다.<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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