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문화(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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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내 사랑의 강!/낙동의 강아!/칠백리 구비구비 흐르는 네 품속에서/우리들의 살림살이는 시작되었다/그리하여 너 함께 기리기리 살 약속을/오목조목 산비탈에 세웠다」
73년 작고한 김용호시인의 대표작인 장시 『낙동강』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시가 읊조리고 있는 것처럼 낙동강은 한민족의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우리 민족의 삶을 지탱케 해준 젖줄이요,요람이었다. 영남지방의 신석기문화가 낙동강 유역에서 싹트기 시작했음은 더 말할 것도 없고,청동기와 초기의 철기문화를 꽃피운데 이어 가야와 신라의 찬란한 문화가 낙동강 연안을 중심으로 발달했음은 고분과 유적에서 출토된 여러가지 유물들로 충분히 입증됐다.
그러나 낙동강의 역사가 한민족의 삶에 긍정적인 모습으로만 존재해왔던 것은 아니다. 6·26동란때는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을 최후의 교두보로 삼아 방어선을 구축함으로써 공산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격전을 치른 「피의 현장」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중령으로 전투에 참여했던 미국 작가 앤드루 기어는 그 직후 『피의 낙동강』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발표해 당시 피로 물든 낙동강의 생생한 모습을 남기기도 했다.
낙동강 연안의 삶에서 나타나는 어둡고 궁핍한 모습은 우리 현대문학에서 이른바 「민중문학」의 효시로 꼽히는 원로작가 김정한의 『모래톱 이야기』 등 일련의 작품에서 실감있게 보여지고 있다. 낙동강 연안에서 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수의 민중들이 겪는 삶의 고통스런 모습들은 실상 오늘날 오염으로 몸살을 앓는 낙동강의 실상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모래톱 이야기』속의 민중들이 힘센 자,가진 자들에 의해 수난을 겪는다면 오늘날 낙동강 연안의 주민들은 현대화·공업화를 최우선으로 삼는 세태의 피해자들이기 때문이다.
낙동강 유역권이 국내 대공업지역으로 지정되고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영남 인재의 반이 여기에 있다』고 지칭돼온 안동주변 일대의 땅이 이미 수몰돼 버렸거니와 1천만 영남지역 주민들의 식수원인 낙동강은 매일 수십만t의 산업·축산 폐수가 흘러들어오는 「죽음의 강」으로 변해가고 있다. 강의 오염과 함께 「낙동강문화」도 역사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될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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