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비례대표 의원 확 늘리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18세기 영국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였던 에드먼드 버크는 선거를 앞두고 자신의 지역구였던 브리스톨의 유권자들에게 국회의원은 지역구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사람이 아니라 국가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만일 브리스톨의 지역 이익과 영국의 국가 이익이 충돌한다면 브리스톨에 손해가 나는 일이라도 자신은 지역구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선거를 앞두고 한 표가 아쉬운 후보자가 지역구 유권자들에게 이런 '한심한' 연설을 할 수 있을까.

*** 돈 病 곪아터진 지역구 의원들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국회 인준 과정에서 단상을 점거하고 인준 처리를 물리적으로 막은 우리나라의 국회의원들에게 버크의 이러한 태도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될 것 같다. FTA가 아니더라도 예산안에 지역구 사업 끼워넣기라든지, 무리한 민원 해결 압력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국회의원들에게 지역구의 이해관계는 최우선적인 관심사다.

지역 유권자들로서는 우리가 뽑아주었으니 우리를 위해 일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도 의원들은 자기 지역구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정책이나 사업을 유치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한다. 미국 정치인들이 적극적으로 우리 기업들의 현지 투자를 자기 지역구에 유치하려고 애쓰는 것이 한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 지방의원이 아니라 국회의원이지만 국가 전체의 이익보다 지역구의 이익 관철에 관심이 더 크고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그 정도는 더욱 심해진다.

지역구 중심의 정치가 가져다주는 또 다른 폐해는 돈 선거의 문제다. 국회의원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있다. 모두가 정치자금과 관련된 혐의 때문이다. 그런데 정치를 하는 데 가장 많은 돈이 들어가는 곳이 바로 지역구 관리 비용이다. 지역구의 유권자들이 '인사'하지 않으면 표를 안 주기 때문에 돈 선거가 불가피하다는 것이 대다수 정치인의 변명이다. 그래서 큰돈 들여가며 지구당을 유지해야 하고 더욱 더 큰돈을 들이며 선거운동을 해야 하는 것이다.

지역구의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해 국가의 주요 정책을 소신껏 처리할 수 없다면, 또 지역구 관리 때문에 많은 돈이 들어가는 정치를 할 수밖에 없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지역구에서 자유로운 정치인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바로 비례대표 의원들이다. 이들은 권역별이든 전국 규모이든 정당 투표에 의해 의석이 배분되는 만큼 직접적인 지역구의 이해관계나 지역 유권자의 요구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현재 비례대표로 선출된 의원 수는 2백73명 중 46명으로 전체 의원 수의 17% 정도에 불과하다. 대승적 차원에서 국가 이익을 논하도록 국회의 정치문화를 바꾸기에는 그 수가 너무나 적다. 더욱이 지역구 출신 의원들의 눈에 비례대표 의원은 '2등 의원'쯤으로 간주되고 있다. 비례대표 의원들이 정책안에 대한 처리를 주도해 나가기 어려운 분위기라는 말이다.

이는 아마도 비례대표 의원직이 스스로 쟁취한 것이기보다 무임승차한 결과라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이제 1인 2표제에 의한 정당투표가 도입된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또 과거라면 '전국구(錢國區)'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될 수도 있겠지만 이제 정치자금의 투명성이나 당내 민주화 등 개혁을 논의하는 마당에 이러한 우려는 접어도 될 것 같다.

*** 전문가 정치인 많을수록 좋다

지난해 말 범국민정치개혁협의회에서는 지역구 의원 수를 줄이고 대신 비례대표 의원 수를 1백명으로 늘리자고 제안했지만 정치권에서는 이에 대해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아마 지역구 출신 의원들은 유권자가 바뀌지 않는 한 우리나라에서 버크 같은 정치인이 나타나길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항변할지 모른다. 맞는 말일 수 있다. 지역구 의원들의 사정이 정 그렇다면 이제 제도를 바꿔 지역구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정치인이 등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수밖에 없다. 새로이 구성된 국회 정개특위가 비례대표 의원 수의 대폭적인 증원에 적극적으로 나서주길 기대한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정치외교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