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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철제계단이 있는 천변 풍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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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제계단이 있는 천변 풍경/김도언 지음, 이룸, 9천원

199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와 이듬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잇따라 당선돼 문단에 데뷔한 김도언(32)씨가 첫번째 소설집 '철제계단이 있는 천변 풍경'을 출간했다. 소설집에는 대전일보 당선작이자 표제작인 '철제계단이 있는 풍경'과 한국일보 당선작 '소년, 소녀를 만나다'를 포함해 모두 11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구속을 싫어하는 물병좌''숙명적인 혼돈의 AB형'이라는 저자에 대한 설명처럼 소설집으로 묶인 11편의 색깔은 제각각이다.

'51개의 시퀀스로 이루어진 한 편의 농담'은 등장인물의 호칭을 이름 대신 생년월일로 표시한다. 가령 주인집 여자는 761225, 자취하는 남자는 710121로 표기하는 식이다. 주인집 여자의 남편 691124는 결혼 직후 뒤늦게 군에 입대했다. 또 소설은 모두 51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졌고, 각 장면 앞에는 1부터 51까지 큼직한 일련번호가 붙어 있다. 소설은 우여곡절 끝에 761225와 710121이 서로에게 빠져드는 과정을 그렸다. 이름을 대신하는 호칭인 생년월일 덕분에 등장인물들은 이름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다. 어떤 이름이든 인물의 성격을 뒷받침하면서 한편으로는 구속하게 마련이다.

'Empty Rooms(엠프티 룸스.빈방들)'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면 변태적인 성욕이 발동하는 고등학교 국어교사 K의 이야기다. K는 평소 눈여겨 두었던 동네의 빈 방에 숨어들어 바닥 장판이나 벽지를 떼어내고는 자신의 몸을 마찰시켜 수음을 한다. K는 소설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과 같은 증상의 여인을 발견하고 몸과 마음이 상쾌해진다.

소설집의 많은 작품이 엽기적인 이야기의 한토막을 거칠게 끝내버린 듯한 느낌을 준다. 비현실적인 상황과 장면의 제시만 있을 뿐 소설로 인해 돌이켜보게 되는 현실은 빠져 있다. '소년, 소녀를 만나다'는 서로에 대한 애정이 지나쳐 형제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던 부모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뒤 이번엔 형이 한 소녀를 만나 과거 부모의 행동을 되풀이하자 동생이 형을 살해하도록 교사하는 이야기다. 소설은 살인을 집행하기 직전에 끝난다. 형제는 부모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다. 동생은 형을 죽여서라도 소녀를 품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소설은 인륜이 전도된 현실을 고발하지 않는다. 동생의 욕구와 불만이 깊이있게 드러나지도 않는다. 소설은 '복잡한 현실은 잠시 잊어버리고 즐기시라'며 옷자락을 붙잡는 것 같다. 물론 소설의 붙잡는 힘은 결코 약하지 않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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