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비서실>철의장막 소련 뚫어라 함병춘 밀사 파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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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81년10월중순 南山의 국가안전기획부 부장실.兪學聖부장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방문을 들어선 신사를 정중히 맞았다.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兪부장의 입술이 떨리듯 열렸다.
『모스크바에 다녀와 주셔야 하겠습니다.』 『네 어디요?』신사는 귀를 의심하듯 되물었다.
『어려운 부탁입니다만 가실분이 大使밖에 없습니다.대사께서도 잘 아시겠습니다만 한반도와 남북관계 안정을 위해서는 북한과의 대화도 중요하지만 소련.중공의 도움없인 어렵지 않겠습니까.그러자면 소련.중공과도 대화창구가 있어야겠습니다.』 兪부장의 얼굴은 계속 긴장을 풀지 않았다.난감해하는 신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우리部는 그동안 소련과의 대화채널확보를 위해 작업해 왔습니다.물론 미국의 중개지원하에 했지요.이제 대사께서 첫걸음인모스크바에 가는 일을 맡아주십사는 것입니다.저희들 나름대로 연구해 왔습니다만 경력.인품으로 보아 그 임무를 맡을 사람으로는대사께서 최적임입니다.국가를 위해 다시 한번 수고해 주셔야겠습니다.』 대화가 진행되면서 머뭇거리던 신사의 표정이 점점 정리돼갔다.이윽고 입을 열었다.『알겠습니다.국가가 원하고 제가 적임자라면 해봐야지요.』 兪부장은『신변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구체적인 사안은 우리부의 담당국장을 만나시면 아실 것입니다』며 대화를 마무리지었다.안기부장 방을 나선 신사는 前駐美대사였던 咸秉春-.그는 10.26이후 외무부를 떠나 延大교수로 복직해 있었 다.며칠 전 兪안기부장이 차나 한잔 했으면 한다고 해 다소 의아해하면서 남산을 찾았던 그는 그런 임무를 맡길줄 상상도 못했다.
다음날 咸대사를 안내한 사람은 李相悅해외정보국장(現 이란대사).李국장팀은 咸대사에게「M(모스크바)프로젝트」에 관해 브리핑했다.그에게 부여된 임무는 韓蘇관계의 새로운 장을 열기 위한 1단계 공작으로 소련과 학술.문화 교류 방안을 마 련하라는 것이었다. 『접촉대상은 소련의 과학아카데미 동양학연구소.극동연구소 책임자와 외무부의 동아시아책임자.대화창구를 어떻게 열것인가에 대한 상황판단은 현지에서 全權을 갖고 처리해도 좋음.한국정부의 기본적인 메시지는 워싱턴의 안기부 北方창구를 통해 모 스크바에 전달돼 있음.』 이같은 골자를 바탕으로 브리핑은 계속됐다. 『대사님의 소련 방문을 美CIA와 蘇KGB도 알고 있습니다.모스크바에서 KGB의 보이지 않는 협조가 있을 겁니다.신변안전문제까지 포함해서입니다.』 『이번 임무는 고도의 보안속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외무부는 물론 우리 정부내의 어떤 기관도 모릅니다.제일 중요한 것은 북한 친구들의 눈에 신변이 노출되지않게 신경을 쓰는 일입니다.대사님의 얼굴은 국제적으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잊 지 마십시오.』 駐美대사로 국제무대가 낯설지않은 그였지만「모스크바에 잠입하라」는 密命은 정말 고통과 긴장이 따르는 일이었다.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이끌던 81년10월 냉전체제로 시계를 돌려 생각하면 극비 단독 모스크바 방문은 일대 모험이 었다.지금은 마음대로 여행도 하고 러시아 보따리장수들이 서울의 남대문시장.부산의 텍사스촌을 누비고 있지만 당시는 적성국이었고 갈수 없는 머나먼 凍土로 인식되었던 소련이었다.
咸秉春의 모스크바 密派는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그의 모스크바行 배후에는 미국의 CIA(중앙정보국),소련의 KGB(국가보안위원회),우리의 안기부간에 복잡한 거래와 계산이 있었다.5共초 평양을 따돌리고 007영화처럼 펼쳐진 극비의 이 북방외교첩보 드라마는 中央日報「청와대 비서실」을 통해 오늘 처음 공개된다. 드라마의 출발은 5개월전인 81년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케이시 美CAI국장 초청으로 訪美한 兪부장이 백악관의 부시 부통령을 찾아간데서부터 시작된다.구체적 내용공개를 꺼리는 兪부장이 전하는 당시의 상황.
『부시를 만나 대뜸 우리를 도와 주셔야 겠다고 했지요.부시가고개를 끄덕이더군요.』 『한반도의 안정과 전쟁 방지를 위해서는북한과의 관계개선이 필요하고,그러자면 소련.중국과 비공식대화 채널을 가져야 되지 않겠느냐고 했지요.중개지원은 美 국익에도 부합된다는 이유로 도움을 요청했지요.』 兪부장의 그같은 제의는미국도 미처 예상치 못했던 대담하고 파격적인 것이었다.한국의 정보최고책임자가 CIA국장 초청으로 미국을 공식 방문한 것도 중앙정보부 창설이래 처음있는 일이었다.
兪부장의 제의가『全斗煥대통령과 사전에 얘기가 된 것이었는가』에 대해 청와대출신 Q씨는 시인도,부인도 하지않고 있다.다만 CIA국장을 역임했던 부시부통령이 분쟁지역의 문제해결,외교업무의 개척에 정보기관이 먼저 나선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밝히고 있다.
兪부장은 부시부통령에게 독자적인 비밀공작이 아닌 미국과의 사전.사후협조를 철저히 하겠다고 약속했다.부시부통령이 뒤를 밀어주자 비교적 한국에 호의적이었던 케이시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또 당시는 全대통령과 레이건대통령의 워싱턴회담 3개월 뒤여서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5박6일간 머문 兪부장은 워싱턴을 떠나면서 駐美대사관의 孫章來안기부공사에게 일을 추진하라고 지시했다.孫공사는 全대통령의 訪美와 金大中씨 감형문제를 미국측과 막후협상해 성사시킨 인물이었다. 서울에 돌아온 兪부장은 全대통령에게 자세히 보고하고 좋은 프로젝트라며 적극 추진하라는 격려를 받았다.당시 全대통령은李長春외교담당비서관의 브리핑을 받아 북방외교 필요성에 관해 많이 알고 있었다.
남산은 孫공사에게 구체적인 비밀명령을 내렸다.孫공사는 모스크바 커넥션을 만들만한 사람을 물색했다.
국무부의 퇴역 소련전문가,對蘇 무역업자,그리고 소련과 관련있는 학자.언론인을 샅샅이 뒤졌다.
***시거통해 의사타진 그가 찾아낸 곳중 하나가 조지 워싱턴대학의 중소문제연구소였다.이 연구소는 美국무부의 東北亞정책입안자문역할을 하는 곳으로 정평이 나있었으며 孫공사도 군대시절 여기에서 공부한적이 있었다.
그는 그런 인연을 앞세워 개스턴 시거소장(전 미국무부차관보)과 스태프인 金英鎭교수를 접촉했다.金교수는 서울대 졸업후 유학,시민권을 얻고 공산권 문제에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다.孫공사는이들을 통해 모스크바에 이념과 군사적 이해관계를 떠나 인적.학술적및 문화교류를 트자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25面에서 계속 朴正熙대통령에게 발탁돼 38세에 청와대정치특보를 하고 41세때 주미대사를 지낸 하버드대 법학박사 咸秉春.咸台永부통령의 막내아들로 1백80㎝가 넘는 훤칠한 키에 지성을 갖춘 국제적 신사.朴東宣사건의 와중에 주미대사를 그만두고 외교안 보연구원 대사로 해양법관계 각종 국제회의에 참석했던그는 10.26후 연세대교수로 복귀해 강의(법철학)에 열중하고있었다. 그의 경력이 말해주듯 모스크바 잠입은 咸대사에게 매력적인 일이기도 했다.냉전을 뚫고 韓蘇관계의 변화 가능성을 타진하는 일은 그의 학문적 열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그는 주미대사시절 朴東宣사건의 코리아게이트를 놓고 카터행정 부의집요한 對韓압력을 겪어 누구보다 외교의 다각화를 절감하던 터였다. 단독 잠입 이틀전 그는 里門洞 안기부 해외정보국장실에서 마지막 브리핑을 받았다.
『모스크바 출발과 비자발급은 東京입니다.소련대사관에서 비자를발급받으시고 아에로플로트 항공기를 타십시오.체류기간은 1주일정도로 예정하고 있습니다.돌아오는 코스는 파리나 런던입니다.東京을 거쳐 서울로 오십시오.모스크바공항에는 咸대사도 아시는 金교수가 나올 겁니다.모스크바측 상대자들도 咸대사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우선 목표는 학술.문화의 창구개설입니다.경제교류의 확대와 외교관계수립전망까지 살펴주십시오.』 관계자는 일정이 적힌 메모지와 간단한 참고자료.안내책자,그리고 전자손목시계.털스웨터.자개 담뱃갑.스타킹.볼펜등 선물이 담긴 쇼핑백을 건네주었다.
참고자료에는 모스크바내 미국.일본대사관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예기치 않은 상황이 벌어지면 신변보호를 요청하라는 것이었다.또하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在蘇고려인회 부회장 許眞씨.
許씨는 89년6월 金泳三대통령이 통일민주당 총재시 절 모스크바를 방문했을때도 막후교섭을 한 인물로 그때 처음 한국과의 창구를 맡았다.咸대사는 학생들에게 미안했지만 미국에서 학술회의를 한다고 적당히 둘러대고 東京行 비행기를 탔다.
咸대사 미망인 沈孝植씨의 회고.
『어느날「나 소련 가게 됐어」라고 담담하게 말씀하시더라구요.
그때만해도 모스크바 비행기타고 가는 것을 상상이나 할수 있었습니까.단신으로 적지에 들어가는 남편을 보는 심정이 오죽했겠어요.극비라고 하니 누구에게도 말을 못하고 무사히 돌아 오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만 했지요.지금까지도 남편이 모스크바에 갔다온 얘기는 안했어요.』 ***카피차.許眞 만나 10월27일 나리타공항에 도착한 그는 현지 안기부 요원의 안내를 받고 바로소련대사관으로 향했다.소련대사관의 비자발급은 신속했다.이미 KGB로부터 연락이 있었기 때문이다.대사관에서 나오는 순간 조총련 눈길이 없나 등뒤가 따가웠다.
우리 대사관에는 알리지 않았다.안기부의 東京 據點長인 李常九공사(前 안기부2차장)가 그를 안내했다.
28일 咸대사는 소련국영 아에로 플로트에 몸을 실었다.美 CIA요원이 멀리서 그의 출국을 지켜보았다.같은 시간 兪부장은 美CIA서울책임자인 로버트 케네디에게 咸대사가 모스크바로 떠난사실을 알려주었다.워싱턴의 孫공사도 CIA.부통 령실.앨런안보담당특보실에 통보해주었다.
그날 오후 모스크바의 세레미츠예보공항.咸대사는 큰 호흡을 하며 차가운 모스크바 하늘을 쳐다보았다.공항에는 극동연구소 관계자와 金英鎭교수가 나와있었다.소련에 익숙한 金교수는 咸대사와 같은 경기고 출신으로 워싱턴에서 팬암항공기편으로 3시간전에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咸대사는 코스모스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다음날부터 그는 동양학연구소와 극동연구소의 카피차(82년외무부차관),한국계인 게오르그 金박사를 차례로 만나 양국관계의 개선 방안과 동북아 정세,남북관계에 대해 토론과 대화를 나누었다. 소련내 韓人중 최고의 지성으로 크렘린에 탁월한 정책자문가였던 게오르그金은 韓蘇관계 개선의 막후공로자였다(88년 한국을 방문한 그는 89년 지병으로 숨졌다).
카피차는 동북아문제에 관한 외무부의 최고전문가였다.
모스크바측은 학술.문화교류에 우호적인 자세를 보였고 韓蘇학술회의를 개최키로 의견접근을 보았다.안기부가 목표한 1단계 학술교류문제는 성공한 것이다.咸대사는 임무를 일단락짓고 모스크바 거리를 관광했다.무엇보다 모스크바에 한국계 소련인 이 눈에 띄는 점을 알고 북한관계자를 만나도 신변을 적당히 얼버무릴 자신이 생겼다.그의 일거수일투족은 KGB나 CIA에 의해 체크되고있었으나 북한대사관은 까맣게 몰랐다.
咸대사가 붉은광장에서 기념 사진을 찍는 여유를 즐기고 있을때서울의 兪부장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미국.소련과 신변보장 협조약속이 있었지만 駐美대사를 지낸 외교 거물이 혹시 북한대사관에 납치라도 당하면 어쩌나 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렇다고 전화는물론 어떤 직접적인 메시지 전달방법도 없었다.
11월2일 임무를 마치고 파리공항에 내린 咸대사는 兪부장에게무사도착을 알리는 전화를 걸었다.파리의 안기부요원이 마중나왔다.兪부장은 咸대사 집으로 연락해 주었다.
***파리電話 받고 안도 미망인 沈씨의 기억.『파리에서「나왔어 여기왔어」하는 남편의 소리를 듣고 나도 모르게 휴하는 한숨이 나왔지요.참으로 감격적인 순간이었어요.그러나 그 기막힌 감격을 그때 누구와도 나누지 못했습니다.』 북방외교의 씨앗은 5共시절 이렇게 뿌려지기 시작했다.어느날 갑자기 朴哲彦이 뚫은 것이 아니다.비록 즉시 성과를 못보더라도 이처럼 비밀속에 뿌려진 밀알들이 싹이터 열매를 맺는 것이다.82년5월 張玲子사기사건으로 兪부장은 인책경질되었 고 83년9월 소련전투기의 KAL機 격추사건이 터져 조금씩 쌓은 韓蘇관계는 한순간 허물어지기도했다. 咸대사는 張玲子사건직후 청와대비서실장을 맡았다가 83년10월9일 아웅산에서 숨졌다.아웅산참사 10주년을 맞아 최근 咸박사의 유고집『한국의 문화전통과 法』이 출판됐지만 당시 정부관계자와 유족들은 아직도 그의 모스크바密使를 자랑하지 않는 신중함을 보이고 있다.
〈朴普均기자〉 5共초「서울과 모스크바 막후채널」프로젝트의 책임자인 兪學聖안기부장이 88년 국회국방위원장시절 陸本국정감사중사열하고 있다.원내는「밀사 咸秉春」을 만난 동양학연구소의 게오르그 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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