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의미 전혀 없다/청와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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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화 83억 변칙 실명전환에 격노/“「박철언재판」과 연계” 오해우려 강경선회
청와대는 한화 김승연회장에 대한 구속이 단순한 형사사건으로 범죄사실에 따른 조치일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외화밀반출 등의 사실이 확인된 만큼 구속은 당연하다는 설명이다.
예전같으면 「김영삼대통령의 사정의지」라는 언론의 해석을 마다 않았을 청와대 등 여권핵심의 이러한 태도는 무엇보다 재계에 대한 충격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경제회복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마당에 경제의 추진력이 되는 재계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가 돼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인 것이다.
사실 청와대는 금년 4월 김 회장의 외화관리법 위반혐의가 짙은 「LA별장」 구입이 터져나오자 아주 부담스러워했다. 부정부패 척결을 내세운 새정부지만 국내 10대 재벌인 한화를 「손댈」 경우 수반될 경제쪽의 위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치권의 사정정국으로 사회전체가 움츠려있는 마당에 재계까지 손댄다면 「이제는 재계 차례」라는 해석이 대두될 것이고 그 부정적 여파는 결국 정부의 몫으로 돌아온다는 생각이었다.
이때만해도 정부 관계자들은 미국의 수사협조문제 등 수사가 쉽지 않다며 머뭇거렸고 김 회장의 출국으로 수사진전이 어렵다고 둘러대기도 했다. 정부는 그리스에 머물던 김 회장이 동생과의 재산분규를 빨리 정리하는 등 내부잡음 소지를 없애기를 바랐으나 도리어 해외에서 사치생활 등이 보고돼자 난처해했다.
김 회장이 소유한 한 특정회사를 포기토록하는 선에서 매듭짓자는 안도 제기됐으나 불필요한 잡음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이마저 없던 것으로 했다. 또 그런 와중에 김 회장이 귀국하자 가능한 빨리 조사를 끝내고 사건을 마무리짓기를 바랐다.
다만 김 대통령의 김 회장과의 개별면담여부에 대해서는 언급을 일절 피하고 유보적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면서 위법사실이 드러나고 과거의 사생활에 대해 여론이 분분하자 그 처리 수준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여기에 금융실명 전환 마감직후 터져나온 한화의 83억원 변칙 실명전환 사건은 치명적이었다. 정부의 시책에 대한 재벌의 파렴치에 김 대통령이 격노했고 여론도 최악의 상황이었다. 검찰에 출두하는 당당한 모습의 김 회장을 두고 편파사정이니,개혁의 한계니하는 비판여론이 들끓었다. 또 김 회장과 박철언의원간의 밀착된 관계에 대한 구설수도 끊이지 않았다. 김 회장의 구속여부를 박 의원의 재판과 연계시켜 갖가지 소문이 꼬리를 물자 사법처리 불가피로 선회했다.
하지만 이때가지만해도 불구속 기소선에서 매듭짓자는게 사정당국의 복안이었다. 저지른 잘못이나 이후의 행위는 괘씸하지만 「경제」를 위해 참을 수 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이는 경제활력 회복을 위한 정부의 고심을 웅변하는 대목인데 검찰의 2차 조사에서 확실한 혐의가 포착된 후에도 인신구속여부는 유동적이었다는 후문이다.
김 대통령의 방미중 증거를 보강한 검찰은 범죄사실을 고위층에 보고,결심을 요청했고 고위층은 죄질과 김 회장의 자세,비등한 여론을 감안해 단안을 내렸다는 얘기다. 단 정치적 의미가 없는 단순한 형사사건으로 규정하여 재계에 대한 충격을 최소화시키기로 한 것이다.
정부 관계자는 쌀개방 등으로 인한 어려운 정치국면의 방향을 바꾸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있지 않느냐는 일부의 해석에 더욱이 말도 안된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이번 구속조치가 대통령의 귀국후에 이루어졌고 대통령의 단안이 작용했다는 해석에서 볼때는 정부의 주장대로 단순한 사법으로만 보기는 어렵지 않느냐는 문제제기도 있다.
특히 외환관리법 위반문제는 재계의 모든 업체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안고 있는 어려운 문제라는 점에서 볼때 재계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검찰이 시기선택을 잘못하여 부담을 상부로 넘긴 모양이 됐다는 지적도 있다.<김현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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