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도 채널」 사용여부가 쟁점/풀리지 않는 훈령조작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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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3가지 조건」싸고 임 차관­이 특보 시각달라/정 총리 청훈 안기부장에 늑장 전달도 의문
지난해 9월의 제8차 남북 고위급회담에서 정부훈령을 조작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이동복 안기부장특보에 대한 의혹은 날이 갈수록 증폭되고 있다. 민주당이 날카롭게 이 특보의 조작혐의를 쟁점화하고 있고 감사원이 사실규명의 감사에 착수해 이 사건이 어떻게 결말날지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남북문제를 다루는 유관부서에 심대한 충격을 줄 것이 틀림없는 이 사건의 쟁점을 다시 짚어본다.
◇감사원 조사의 초점은 훈령조작설이다. 평양에서 8차 고위급회담이 열리고 있던 지난해 9월17일 새벽 0시30분 임동원 당시 통일원차관이 교류협력분과위에서 합의한 내용을 타결하기 위해 정원식 당시 총리와 협의,서울에 청훈하자 이 특보가 같은 시각에 독자적으로 엄삼탁 당시 서울상황실장(당시 안기부 기조실장) 앞으로 기존 입장을 재확인해 달라는 「청훈 지시에 대한 건의」를 보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엄 실장은 17일 오전 7시15분 「서울상황실장」 명의로 「평양상황실장」 앞으로 3가지 조건을 고수하라는 「건의사항에 대한 회신」을 보냈다. 이 의원측에서도 이 전문들은 공식 대표단 사이의 전문교환이 아니라 실무자들간의 전문교환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공식 대표단 사이의 전문교환이 있는데 안기부측이 별도 채널을 갖고 회담전반을 통제하려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이동복특보는 이 전문을 보낸 것은 임동원차관이 북측 제의를 너무 낙관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8차 회담에 임하는 남측 입장은 ①이산가족 고향방문단사업 정례화 ②판문점 이산가족 면회소 및 우편물 교환소설치 ③동진호 선원 귀환 등 3가지 조건을 전제로 이인모노인을 북송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훈령은 ①②③관철이 바람직하고 어려우면 ①②,최후적으로 ①③을 관철하라는 것이었다. 이 의원이 공개한 임 차관의 보고서에 나와있듯 당시 교류협력분과위원장 사이의 합의는 「남북면회소를 금년내에 설치운영하도록 하고,이의 실현 절차를 포함한 이산가족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남북 적십자회담을 즉각 개시토록 한다」는 것으로 임 차관 주장과는 달리 최후보루인 고향방문단 정례화가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 차관은 『북측이 3개월 간격의 고향방문단을 수용하겠다고 했으나 3가지 조건을 고수하라는 바람에 결렬됐다』고 말하고 있다. ①과 ②가 수용됐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의문은 엄삼탁실장이 어떤 경로를 통해 「회신」을 작성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의원은 엄 실장이 이상연 안기부장에게조차 보고하지 않고 이 회신을 보냈다고 주장했다.
이 부분에 대해 이 의원은 이 특보가 엄 실장에게 「공작차원의 시간조작」을 요청하지 않았는지 의심하고 있다. 더군다나 안기부는 남북대화와 관련해 모든 통신시설을 장악하고 있을뿐 아니라 상대측에 해독이 안되는 비화기까지 있어 수시로 통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관련해 이 「회신」이 「훈령」으로 둔갑한데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된다. 이부영의원측 설명에 따르면 17일 오전 8시가 조금 지나 정 총리가 『회신이 왔느냐』고 물었으며,김용환 책임연락관이 「회신」 내용을 보고했다는 것이다. 이 경우 김씨가 보고한 경위와 내용도 확인해야 한다. 같은 차원에서 공식 청훈은 강경입장의 「회신」을 보낸지 3시간만인 17일 오전 10시가 넘어서 이 부장에게 전달된 경위도 의문이다. 또다른 수신인인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나 통일원 부총리에게는 전달조차 하지 않았다. 이 바람에 공식훈령이 평양에 타전된 것은 17일 오후 4∼5시. 회담은 4시40분에 시작돼 6시에야 끝났다.
◇이 공식 훈령이 전달된 시간이 문제다. 이 특보는 『보고받은 것이 회의가 끝나 이동중인 때였고,고향방문단 정례화는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는 기존입장이어서 전달에 시차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 총리나 이 특보의 증언을 인정해도 오후 9시가 넘어서야 정 총리에게 보고됐다. 또 정 총리는 이 내용을 다른 대표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정 총리는 왜 묵살했는가. 이 의원측에서는 이 특보가 설득해 정 총리도 같은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 특보는 서울에 돌아온뒤인 10월1일부터 두차례에 걸쳐 판문점에서 공식훈령의 입장에서 협상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한 것은 북한이 애초 고향방문단 교환의사가 없었던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다.<김진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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