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화」는 제3의 개국(유승삼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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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번 아태경제협력(APEC) 지도자회의를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국제학」 「지구촌화」 「지역화」 「세계화」라는 낱말들을 일반 국민들도 피부로 실감할 수 있었던 점일 것이다.
○수출입 비중 무려 85%
전국민적 차원에선 이제 피부로 실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는 「국제화」된 환경속에서 살고 있다. 92년 현재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중 수출입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85%에 이른다. 일본이 세계 최대의 수출국이라서 얼핏 그 비중이 우리에 못지 않으리라 여겨지지만 실은 15.6%에 지나지 않는다. 그밖에 수출입 대국들을 보아도 미국이 16.8%,독일 46.4%,프랑스 36% 정도다.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나라보다 구조적으로 국제화하지 않고서는 버텨낼 수 없게 되어있는 것이다.
GDP중 수출입 비중이 85%나 되는 경제구조에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러나 싫든,좋든 적어도 앞으로도 상당기간은 이런 구조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돼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가 번영을 추구하는 길은 정부차원에서나,국민 개개인의 차원에서나 세계의 정세·조류의 변화에 민감해 그 물결을 오히려 남보다 먼저 타서 주도해 나가는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세계는 우리가 처한 상황과는 전혀 걸맞지 않게 자기 중심적이고 권위적이며 감정적이기까지 해 국제화와는 정반대의 길로 나가기 일쑤다.
지난 9월 우리나라에 온 인도네시아 여성운동가 3명이 기자회견을 열어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한국기업의 횡포를 고발한 적이 있었다. 그들에 따르면 한 공장의 현장감독은 여공이 작업중 잡담을 했다고 반창고로 입을 틀어막았고 또다른 공장에선 조는 사람의 눈썹을 면도기로 밀어버린 일도 있었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에서뿐이 아니다. 중국 천진에 진출한 한 한국 신발공장에서는 한국인 관리자가 작업속도가 느린 여공을 무릎꿇게 하고 반발하는 사람들을 폭행했는가 하면 어느 의류공장에서는 한국인 관리자가 근로자를 발로 차 부상케 해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같은 일이 잦자 항의시위가 일어나 그 소식이 외신을 타고 국내 언론에도 보도된바 있다. 한두 공장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느냐 할는지 모르나 당시 외신은 올들어 천진에서 일어난 10건의 파업중 9건이 한국기업에서 일어났다고 지적해 한국기업에 문제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우월의식에 사로잡혀
그뿐인가. 지난 4월 아르헨티나에서 의류공장을 하는 한국인 기업주가 브라질 출신 10대 불법체류자를 혹사하다 구속돼 현지 언론으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은 일도 있었다는 것이다. 또 미국의 한국식당 등에서는 히스패닉을 고용해 법정 최저임금에도 훨씬 못미치는 저임으로 혹사하고 있어 교포들로부터도 비난을 사고 있다.
「국제화」가 저절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개방정책을 쓴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GDP중 수출입 비중이 85%가 되고 그 총규모가 2천억달러에 가깝고 보면 정부가 할 수 있는 부분은 그 일부 밖에 안된다. 전 국민의 의식과 행동이 국제화하지 않고는 나라의 국제화는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들이 우리 문화와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다른 민족,다른 문화의 사람에게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해외에 진출한 많은 한국인들은 근거없는 우월의식에 사로잡혀 다른 민족과 문화를 무시하고 자신의 것을 강요하려 들기 일쑤다. 우리들이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있다면 그들도 그러하며,우리 문화가 가치가 있다면 다른 나라의 문화 또한 가치가 있다는 걸 생각 못하는 것이다.
또 우리나라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최일선에서 나서서 지휘하고 간섭해야 직성이 풀리는 경향이 있다. 해외에 진출한 다른 나라의 기업들이 대부분 현지인을 감독이나 관리자로 삼는데 비해 우리 기업인들은 거의 대부분 직접 일선에 나선다. 심지어 우리 교포들마저 그런 자리에 채용하려들지 않는다. 이는 부정부패에 젖은 우리 사회에서 배태된 타인에 대한 불신풍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국인의 해외진출은 1천년만에 맞은 새로운 역사다. 우리 민족은 고구려의 멸망으로 대륙을 잃은 이래 이제까지 한번도 남을 다스려본 경험이 없다. 그런 경험부족은 다른문화,다른민족과의 공존공생에 우리들을 대단히 서투르게 만들어 버렸다. 그것이 해외진출 기업들이 잦은 말썽을 일으키는 한가지 이유인지도 모른다.
○보편적 기준에 맞춰야
「국제화」는 곧 개국을 뜻한다. 구한말의 개국을 제1개국,70년대의 수출을 제2의 개국이라고 한다면 다국적 기업과 한국기업의 현지 진출이 늘고 경제가 국경없이 지역화하는 현재의 상황은 제3의 개국이라 할만하다. 이러한 시대에서 우리는 우리의 시각을 거시화해 국내적으로는 분단의식에서 벗어나고 국외적으로는 의식과 행동을 세계적·보편적 기준에 맞추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릇된 우월주의와 국내에서 하던대로의 단기차익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조만간 우리는 상품경쟁에서 져서가 아니라 민족적·문화적 반발 때문에 세계시장으로부터 축출될 것이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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