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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선 현실주의로 선회/정치공세보다 대안있는 비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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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실명제 대체입법도 경제회생 방침/환경변화 따른 불가피한 선택 분석
민주당 노선이 현실에 가깝게 접근하고 있다.
국정감사 기간중 2백37명의 증인을 요청하고도 60여명밖에 합의하지 못했으나 지난 9월처럼 국회를 파행으로 몰아가지 않았다. 27일 당무회의에서 확정한 실명제 대체법안은 3천만원 이상 금융거래의 국세청 신고 등 강력한 장치들을 경기활성화를 위해 삭제키로 했다.
이상론과 강경론이 득세해온 지금까지의 야당상과 견줘볼 때 엄청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한달전까지만해도 민주당은 김영삼정부와 「누가 더 개혁적인가」를 경쟁했다. 6공 초기 5공에 대한 것처럼 과거정권에 대한 「10대 청산과제」를 설정해놓고 정국 주도를 노력했다. 사정을 하면 범위확대를 요구하고,실명제·정치관계법 등 각종 제도개혁을 요구했다. 전직 대통령의 증언을 요구하며 대통령 국회연설을 유산시키는 등 초반 정기국회를 파행시켰다.
그러나 지난달 28일 이기택대표가 기자간담회에서 『과거에 매달리지 않고 경제활성화에 주력하겠다』고 천명한 것을 계기로 민주당 내부에 현실론 목청이 커지고 노선은 현실추구쪽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의 현실노선 추구는 실명제 대체입법안을 정부의 긴급명령과 대동소이한 내용으로 확정한데서 극적으로 나타났다.
당초 민주당이 마련한 실명제 법안의 핵심은 위장실명 자산에 대해 세무조사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26일 경제대책특위(위원장 유준상)는 경제활성화를 저해한다는 이유로 벌칙조항만 두기로 하고 삭제했다. 또 실명전환기한인 10월12일이후 국세청 통보범위도 3천만원 이상의 모든 금융거래에서 「현금」 거래만으로 범위를 제한했다.
이날 회의에서 원안을 주장한 사람은 김병호 정책위의장과 제정구의원뿐이었다. 『계속되는 지하경제를 줄여가기 위한 장치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자 유인학의원은 『어설픈 정의감으로 나라 경제를 망치려하느냐』며 그런 조항을 넣으면 예금이 줄어들게 된다고 반대했다. 『실물경제를 모르는 조치』(이원형의원) 『소급입법을 하자는 거냐. 경기를 죽이는 행위다』(장석화의원)라는 반박도 나왔다.
실명전환의무를 지키지 않은 가명자산에 대한 과징금도 2년 이상 60%로 하자는 원안에 대해 『공산당식 발상 아니냐』(장재식의원)는 반발에 정부안대로 5년 이상 60%까지 연차적으로 늘어나도록 고쳤다.
집단지도체제의 복잡한 집안사정까지를 감안할 때 이같은 민주당의 변신은 우리의 정치환경이 변하고 있음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공세논리가 실종됨에 따라 야당으로선 지금까지와 같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나 투쟁일변도로는 더이상 버틸 수 없는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어찌보면 민주당의 유연한 입장은 생존을 위한 일종의 자구노력일 수도 있다.
이같은 변신엔 이 대표가 앞장서고 있으며 김대중 전 대표가 적극 뒷받침하고 있는 것 같다. 김 전 대표는 지난달 17일 힐튼호텔에서 이 대표를 만나 『국회는 국회대로 하고 회기가 끝난뒤 다시 국정조사를 할 수도 있지 않느냐』며 과거지사에 너무 얽매이지 말라고 조언했다.
이 대표는 27일 국회 대표연설에서 『지금이라도 정부와 정치인,기업가와 근로자,그리고 학생과 주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절박한 오늘의 우리 현실을 직시하고 총력을 모아 미래를 준비해나가야 한다』며 「발상의 대전환」을 촉구했다. 이 대표의 행보는 이 발상의 대전환을 먼저 행동으로 보이고 있는 셈이다.
지난 국정감사에서도 상임위마다 증인을 요구하고도 이를 국정감사 등 국회 운영과 바로 연계하지는 않았다. 특히 김대중 납치사건과 관련한 이후락씨의 증인채택도 현안으로 남겨놓고 있다.
이 대표의 현실론은 경제문제를 푸는 방식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그는 27일 연설에서 『위기에 처한 우리 경제를 살리고 민생을 안정시키는데 여야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예산에 대해서도 무작정 삭감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체 세법안에 따른 세수 추계를 재무부에 의뢰하는 등 현실성 있는 대안을 내놓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런 현실론은 당내 개혁정치모임은 물론 외부로부터 상당한 반발을 받고 있다. 한국 정치판에서 벌써 영국식의 「충성스런 야당」이 정권경쟁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대여공세 한번 제대로 못한다고 불만이다. 이 대표와 가까운 당직자 가운데도 『이 대표의 방식으로는 독자적인 색깔을 만들기 곤란하다』는 불만을 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권을 맡기 위해서는 더욱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 주류측 생각인 것 같다.
민주당은 계파간의 이해관계외에 기본적인 노선차이까지 포함하고 있어 이런 현실론 회귀현상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김진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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