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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사람>돌아온 인민군포로 브라질거주 임복호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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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동족상잔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회한의 巨濟포로수용소.40년만에 이곳을 찾은 제3국行 「인민군포로」출신 29명 대부분이되살아난 악몽에 몸서리칠때 브라질에서 온 任履鎬씨(70)는 유독 무표정했다.아니 그는 마치 풍광이 수려한 거 제에「소풍온 아이」같아 보였다.
그러나 사실 任씨는 누구보다도 가혹하게 전쟁의 후유증을 앓고있는 사람이다.피비린내 나는 韓國戰직후 남.북한을 모두 거부하고 54년 2월 印度行 군함에 몸을 실었던 그는 최근 브라질의낯선 지역에서「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걸인의 행색」 으로 발견돼 韓人사회에 충격을 던져준 인물.
처절한 기억을 단절하려는듯 그는 가능한한 멀리 도망가 한국말조차 거의 잊었고 대신 처자식과 생이별한 후 홀로 떠돈 40년간의 외로움과 생활고는 이제 가끔 그를「정신일탈」의 상태로 안내,어느 의미에서든 과거의 악몽에서 놓아주곤한다.
지난 25년 황해도 松禾郡 한 농가의 장남(2남1녀)으로 태어난 그는 일본농업학교에서 공부한 후 한때 아버지를 도와 일을했다. 6.25동란중 압록강으로 진격했던 유엔군이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는 과정에서 그는 南下하는 유엔군의 포로로 잡혔다.그가 잡힌 장소는 백령도부근의 한 섬.그는 당시 자신이 치안대원으로 활동한 것이 문제가 된 것 같다고 했다.이미 17 세에 결혼,슬하에 3남매가 있었던 그는 아내,아이들과 생이별한채 51년2월 거제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전쟁중 모두 17만명의 인민군과 중공군이 수감됐던 이 수용소에서 反共포로와 親共포로간의사상戰은 치열한 살육전으로 이어졌다.
친공포로들이 공산주의를 비난하는 반공포로들을 집단구타로,또는쥐도 새도 모르게 처형하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그는 살의와위기감속에 아침마다 수용소정문에 반공포로들의 시체가 쌓이는 것을 목격,『지긋지긋한 이나라를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살육전을 보다 못한 유엔군이 반공포로들을 부산.광주.영천등에 이송 수용,한때 영천으로 이송됐던 그는 때마침 한 軍牧을 통해 제3국行이 가능하다는 정보를 얻었다.
당시 포로로 잡혔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북한으로 돌아갈경우 죽음이나 강제노동의 끔찍한 삶이,남한에서 살경우 평생을「빨갱이 포로출신」이라는 멍에를 걸머진채 부모.형제없이 외롭게 살아야 할 것에 두려움을 느껴야 했던만큼 귀가 번쩍 뜨이 는 정보였다는 것. 그러나 언제 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위협속에 쉬쉬하면서그는 54년 2월 75명의 다른 포로들과 함께 중립국 감시단국가중의 하나였던 인도의 군함에 실릴 수 있었다.
정처없는 방랑의 길이 시작된 것.
오갈 곳 없는 무일푼의 포로들은 임시 기착지인 인도 뉴델리근처 난민수용소에서 다시 2년을「썩었고」,유엔에 의해 최종적으로그들에게 선택권이 주어진 나라는 인도.브라질.아르헨티나였다.
땅넓은 브라질에서 농장주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그는 54명의 동료들과 함께 56년 2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한국인으로는 처음 발을 내딛게된다.
말도,글도,물정도,사람도 전혀 모르는 그들은「꽃섬」이라는 곳의 이민수용소에서 1개월여 제각기 적응훈련을 받고 뿔뿔이 흩어져 나갔다.
이때부터 약 4년전 걸인의 모습으로 발견되기까지 33년동안 任씨는 한국인들의 눈에서 사라져 아무도 모르는 세월을 보낸 셈. 브라질에 함께 온 나머지 사람들은 틈틈이 안부전화를 하기도하고 매년 2월6일 그들이 브라질에 온 날을 기념하는 모임을 갖기도 했으나 그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상파울루에서 2백여㎞ 떨어진 아파레시다市에서 의류상을 하는 한국인 趙龍出씨부부에 의해 그가 발견됐을때 그는 한국사람 같았으나 한국말을 못해 아시아계 걸인쯤으로 알았다고 이번에 任씨와함께 서울에 온 趙씨는 전했다.
약초를 키워 생약을 직접 만드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任씨는 처음 자신의 과거를 숨겼다.
그는 나중에 지난 세월동안 영국계 방직회사를 다니기도 하고 농사를 짓기도 했으며 달러장수,시계수리공,권총수리공등으로 일했다고 했다.
지난 6월 6.25특집극『76인의 포로들』을 제작하기위해 任씨를 취재차 만나 상파울루에서 2백50㎞나 떨어진 로레나市에 위치한 그의 집을 방문했던 문화방송 崔진용프러듀서의 말.『상당한 충격이었다.남의집 창고같은 곳을 월20달러에 빌려쓰고 있는그의 방은 온통 휴지로 가득찬 쓰레기통 같았다.왜 그가 종이를모으는지 모르겠다.또 그의 방에는 넝마같은 옷 몇벌,등산용버너,찌그러진 양재기와 스푼등이 전부였다』고 말했다.
문화방송이 이번에 任씨를 초청했으나 변변하게 걸칠만한 옷조차없어 趙씨가 헌옷을 넘겨주었고 그곳의 한국교민들이 여행경비로 6백달러를 모아 전달하는 온정을 보였다.
아직 무국적인 任씨를 위해 한국정부는 임시여행증명서를 발급해줘야했다.
그는 40년만의 생이별끝에 이번에 방송이 나간 덕분에 남한에살고 있는 동생과 세자녀를 모두 만났다(아내는 재혼후 5년전 사망). 그러나 얼굴도 채 익히지 못한 갓난아이때 헤어졌던 이들에게 감정은 각별하지 않은 듯했다.
그는 담담하게『미안할 뿐,너무 달라져 내자식들 같지않네』라고만 했다.光州에서 안경점을 하는 장녀.장남등이 그의 속옷부터 구두.벨트.양복에 이르기까지 모두 새것으로 갈아입히면서 아예 한국에서 눌러살 것을 제안했으나 정리할 것이 많아 돌아가야 한다고 고집해 애를 먹였다.
이렇듯 자신으로부터도 도망치지 않으면 살 수 없었던 그에게 조만간 한국국적이 주어지고 따뜻한 가족의 품안에서 40년의 슬픔이 잠재워지길 기대해 본다.
[巨濟=高惠蓮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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