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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와 싸우는 美 레스 폴翁-70년 기타인생 갈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뉴욕 맨해턴의 조그만 재즈클럽「핫 튜스데이」는 1주일에 한번씩 78세의 현역「할아버지」기타리스트가 출연해 연주하는 날이면관객들의 열기로 후끈 달아오른다.
9년간 주1회씩 한번도 빠짐없이 이 클럽에서 연주해온 화제의주인공은 50년대를 풍미했던「일렉트릭 기타의 아버지」레스 폴.
70년 가까이 기타줄을 퉁기면서 지문이 거의 지워져버린 그의왼손가락은 명기타리스트 폴의 관록을 대변한다.그러나 관객들의 열광은 그의 화려했던 과거의 명성이나 뛰어난 연주실력때문만은 아니다.고령인데다 病魔와 싸우면서까지 열정적으로 음악의 길을 고집하는 한 연주가의 집념에 대한 존경심과 갈채도 포함돼 있는것이다. 지난 50년대「하우 하이 더 문」「무지개의 저편」등 수천만장의 앨범이 팔려나갈 정도로 많은 히트곡을 연주해낸 폴의왼쪽 손도 지금은 관절염 때문에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손가락은 단 2개뿐이다.뿐만아니라 10년전에는 심장 혈관에 파이프를박아넣는 대수술로 생사의 기로에 섰던 적도 있으며 귀는 보청기신세다. 폴은 몇가지 점에서 포퓰러음악의 역사에 이름이 남아있다.우선 共鳴통이 없는 기타,즉「솔리드 바디」전자기타를 맨 처음 발명했다.
그가 설계해 52년도부터 생산이 시작된 깁슨社의「레스 폴 모델」은 판매대수나 품질면에서 으뜸가는 전자기타의 대표주자로 프로연주가라면 이 모델을 사용해보지 않은 사람을 찾기 힘들 정도다. 특히 50년대말 제작된「레스 폴」기타는 名品으로 인정받아대당 1천5백만원에서 2천만원을 호가한다.
단풍나무와 마호가니를 붙여 만든 무거운 몸체의「레스 폴」기타는 중후하면서도 명쾌한 음색으로 40년이 지난 지금도 전자기타의 기본형태로 친다.
폴의 또 하나의 공적은 뛰어난 녹음기사로서 多重녹음 방식을 개발한 점이다.당시에는 一發녹음이 주류였기 때문에 중후한 음이필요할 때는 많은 인원을 동원한 빅 밴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폴의 多重녹음 방식으로 한사람이 연주 한 것을 계속겹쳐 녹음할 경우 빅 밴드가 연주한 것과 같은 효과음을 낼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폴의 공적으로 포퓰러 음악의 주류는 빅 밴드에서 3~5명으로 구성된 록 밴드로 옮겨졌다.
30년대부터 재즈나 컨트리 밴드에서 연주 활동을 했으며 이때축음기의 코일에 통기타를 연결시켜 연주하다 共鳴때문에 소리가 너무 울리자 共鳴통이 없는 오늘날의 전자기타를 고안해낸 것이다. 40년대부터 50년대에 걸쳐 빙 크로스비등과 함께 활동하며당시 TV와 라디오의 톱 스타 자리를 지켜오다 60년대 중반 갑자기 은퇴해 팬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은퇴한 폴이 복귀를 결심한 것은 공교롭게도 계속 病魔에 시달린게 계기가 됐다.폴은『지금까지 인생에서 좋았던 일과 나빴던 일을 종이에 모두 써 보았다.그리고 역시 기타를 연주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연주활동을 재개 하게됐던 이유를 설명한다.
『음악은 마음으로 연주하는 것이다.음악의 가장 중요한 것은 메시지다.메시지가 좋으면 음악은 사람을 울릴 수도,웃길 수도 있다.』 5년에 걸친 刻苦의 노력끝에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단 두개의 손가락만으로 그의 레퍼터리를 다시 연주할 수 있게 만들 만큼 음악에 열정적인 기타리스트 레스 폴의 음악관이다.
〈金國振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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