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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탐구>50.풀무원식품 창업자 민주당 원혜영의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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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국회 의원회관 4층 元惠榮의원실의 방문객들은 커피나 차가 아닌 시원한 냉수 한컵을 대접받는 일이 많다.
자연식수를 짬짬이 마시는게 우리 건강에 여러모로 유익하다는 설명을 곁들이며「無공해 물 마시기」를 권장하기도 한다.
元의원의 환경.공해문제에 대한 관심을 읽을 수 있는 한 단면이다. 元의원은 노동위 소속이면서 국회 환경특위위원을 맡고 있다.때문에 환경관련 모임이 있으면 멀다않고 찾아간다.지난달말에는 臺灣에서 열린「지구에의 사랑」이라는 韓.日.臺灣 3개국 국제환경회의에 崔冽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과 함께 참석하기도 했다.
元의원의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은 정치권에 들어오기 전부터 각별했다.실제로 元의원은 정계입문전인 80년대초 無공해산업에 뛰어들어 비교적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元의원이 의원회관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내놓는 생수는 그때창업한「풀무원식품(株)」에서 나오는 상품이다.회사경영은 지난 87년 동업한 친구에게 넘겼으나 상표권은 창업주인 元의원에게 있다.元의원은 지난 재산공개때 이 상표권만 별도 항목 으로 집어넣어 6억원으로 신고했다.元의원이 창업한「풀무원」社는 지금 자본금 30억여원의 건실한 기업으로 성장해 있다.
元의원의 지분은 모두 부친 명의로 돼있어 공개대상에서 빠지지만 상표권이라도 신고해야 뒷말이 없을것 같아 좀 부풀려 공개했다는 것이다.
反독재 학생및 재야운동의 화려한(?)경력을 갖고 있는 元의원이 사업가로서의 기질를 발휘한 것이다.
대부분의 운동권출신 정치인들처럼 元의원의 학창시절도 제적과 복학의 연속이었다.그러나 元의원의 경우는 우여곡절이 남다르다.
올해 42세의 나이에 학부 3학년(서울대 역사교육과)에 복학한 것까지 치면 그는 세번 제적되고 네번 복학하는 기록을 세웠다. 元의원은 71년 서울대 교양과정부 학생회장을 지내면서 학생운동에 몸을 담았다.당시는 朴正熙정권이 72년의 維新을 앞두고 최대 反정부세력인 학생운동의 세력약화를 노려 군사교련을 강화하던 시기였다.
元의원은 그해 10월 군사교련 반대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학교에서 첫번째 제적당하고 말단 소총병으로 입영했다.이른바「녹화사업」의 피해자인 셈이다.
제대후 첫 복학에서 元의원은 柳寅泰씨(현 民主黨의원)등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의 석방 과 維新 철폐를 요구하며 다시 시위대열에 합류했다.
이 일로 학교에서 두번째 제적을 당하고 구속된 元의원은 6개월뒤 집행유예로 석방되지만 얼마 안가 긴급조치 9호위반으로 구속돼 1년간 복역했다.그후 재야운동을 하던 元의원은 80년「서울의 봄」때 두번째로 캠퍼스로 돌아왔다.하지만 안 개정국 아래서 학교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5.17이 나면서 元의원은 소위「金大中 내란음모사건」의 연루자로 몰려 세번째 제적을 당하고 쫓기는 신세가 됐다.설상가상으로 신문사 기자로 일하던 부인 安貞淑씨마저 80년 언론통폐합때해직되고 말았다.가계를 꾸려나갈 길이 막막해 직 장을 알아보았지만 제적.복학을 반복하는 元의원에게 마땅한 일자리가 있을리 없었다. 그러다가 생각해낸게 바로 농약을 안쓰는「無공해 농산물」장사였다.거기에는 부친 元敬善씨의 영향이 대단히 컸다.元씨는70년대 중반부터 富川에서 공해 없는 유기농법운동을 벌여왔는데元의원의 환경에 대한 관심은 부친의 이 운동에 자극받 은 바 크다고 한다.부친 元씨가 만든 無공해 농산물의 판로를 위해 元의원은 직매점을 열었으며 이는「풀무원 식품」의 모태가 되었다.
「풀무원」이라는 이름은 부친 元씨가 이미 사용하고 있던 것으로「풀무」는 대장간에서 녹슨 쇠를 벼려 강한 쇠로 만드는 기구를말한다. 부친 元씨는 사람을 단련시켜 쓸모있는 사람을 만든다는의미에서「풀무원농장」을 지어 뜻있는 농민들과 공동생활을 하면서농산물을 생산한 것이다.元의원은 사업이 점차 궤도에 오르자 못다한 학업을 다시 시작하려고 85년 세번째로 복학했으 나 이번에는 학교와 일을 병행하기 어려워 자진 휴학하게 되었다.
87년 元의원은 식품회사 사장자리를 동업자에게 넘겨주고 정치에 뛰어들었다 諸廷坵씨(현 民主黨의원)등 在野세력들과 함께 한겨레민주당을 창당해 새로운 정치세력 결집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 元의원의 출발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한겨레민주당은 13대 총선에서 참패하고 元의원 자신도 富川南區에출마했으나 낙선했다.元의원은 그때 비로소 현실정치의 두터운 벽을 실감했으며 그후 그의 정치행보에 이 실패의 경험은 귀중한 교훈이 되었다.元의원은 정치권에 몸을 담으면서도 자신의 관심영역인 공해문제는 꾸준히 살려 88년「공해추방운동연합」의 정책위원으로 활동했다.
정치적으로는 李富榮.朴啓東.柳寅泰(이상現 民主黨의원)씨등 당시 全民聯 인사와 함께 平民黨및 舊 民主黨간의 야권통합에 힘을쏟는등 재야 가운데서는 온건노선을 걸었다.
그는 환경문제와 함께 국회노동위 소속으로 노동문제에 날카로운관심을 갖고있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朴泳秀기자〉 ◇元의원약력 ▲京畿 富川출신(42세)▲景福高▲서울大 교양과정부 학생회장▲풀무원식품(株)창업▲한겨레민주당대변인▲舊민주당환경복지위원장▲민주당富川中乙위원장▲14代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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