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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걱정에 직장일 “뒤숭숭”(여성인력 활용하자: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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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탁아소 확충 “발등의 불”
미혼의 직장여성이나 취업준비에 열심인 여대생들 사이에 「친정부모에게 아이를 맡길 처지가 못되거든 시부모가 손자를 돌봐줄 수 있는지 확인한뒤 결혼하라」는 농담 아닌 농담이 곧잘 오간다. 직장과 가정생활을 원만히 병행하려 애쓰는 선배 직장여성들이 육아문제로 고민하는 모습은 곧 자신들의 자화상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간밤내내 고열에 시달리던 둘째 아이를 급히 연락받고 달려온 이모에게 맡기고 허겁지겁 출근한 이진영씨(34·Y사 홍보실 근무).
남들처럼 미더운 친정어머니의 도움없이 두 아이를 기르는게 너무 힘에 부칠 때마다 서랍속 깊숙히 넣어둔 사표를 만지작거리는 버릇을 속절없이 되풀이했다. 아이가 좀 나아졌는지,일요일 저녁까지 돌아오겠다고 하고는 월요일 출근시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은 가정부는 돌아왔는지 궁금해 집으로 전화라도 자주 하고 싶건만 「직장에 나와서도 집안일이나 신경쓰는 여편네」라는 느낌을 줄 것 같아 그조차 꾹 참는 것도 새삼 지겹다.
하지만 까마득한 승진차별의 벽을 너어 회사내에서 보기 드문 여성대리가 되는 등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이씨에게 직장의 여자 후배들은 『결혼·출산 후에도 늠름하게 일을 잘할 수 있다는 걸 회사간부들에게,그리고 똑같은 고비를 넘겨야 할 우리들에게 보여달라』고 주문한다.
결혼에 즈음해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된 친구들도 「시간은 많고,할 일은 없다」고 하소연해 당장은 어렵더라도 좀 더 지난뒤 후회하지 않도록 참고 견디라고 입을 모은다. 그들은 다시 취직하려고 아무리 애써도 마땅한 일자리가 도대체 없다는 것이다.
이씨의 첫 아이를 돌봐주시던 시어머니가 시누이가 출산하자 외손자를 키워줄 차례라며 훌쩍 떠나고난후 이씨는 하루하루가 전쟁을 치르는 기분이다. 어렵사리 구한 가정부에게 급료 외에도 이런저런 명목으로 틈틈이 줘야하는 돈까지 합하면 월평균 60만원이 넘으니 1백만원을 밑도는 자신의 월급에 비해 턱없이 큰 부담이다.
이씨는 회사내에서 아무도 활용해본 적이 없는 육아휴직 가능성을 타진해본뒤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부득히 사표를 내야겠다는 생각이다.
여성들의 취업이 점차 늘면서 기혼여성들의 경제활동 참가율도 80년의 35.6%에서 88년에는 45%로 크게 늘었다. 이와함께 5세 미만 어린이에 대한 보육수요(가정에서 양육할 수 있는 어린이 약 44%를 제외한 숫자) 또한 이미 1백만명을 넘어섰으며,2000년에는 1백25만명쯤 되리라는 예상이다.
현재 1백여만명의 5세미만 어린이를 돌보기 위해 필요한 어린이집·직장탁아소 등 보육시설은 3만2천여개. 그러나 6월말 현재 전국의 보육시설은 5천50개로 전체 보육대상 어린이의 14% 남짓한 14만4천명 정도밖에 돌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89년부터 삼성복지재단이 서울 달동네에 세운 꿈나무 어린이집·샛별어린이집 등 5개의 탁아소와 삼성생명이 수원에 세운 효원어린이집 등 전국의 12개 탁아소는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고민하던 일하는 엄마들에게는 큰 힘이 되고있다.
◎“육아문제로 퇴직 생각해봤다” 80% 넘어/말만 모성보호… 직장탁아소 전국 29곳뿐
삼성측은 그밖에도 현재 건립중인 탁아소가 2개며 앞으로도 의욕적으로 탁아소 건립사업을 계속하리라 한다.
육아전문가들은 이처럼 뜻있는 민간기업의 지역탁아소 건립과 직장탁아소 건립이 병행돼야 효율적으로 탁아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기혼 직장여성에 대한 각종 조사에서 「자녀 양육문제로 퇴직을 고려한 적이 있다」는 응답자는 80% 이상.
취업여성의 약 93%가 「탁아소가 필요하다」고 했고,비취업여성의 66%가 「탁아소 이용만 가능하다면 직장을 갖겠다」는 조사결과(한국행동과학연구소) 역시 자녀양육문제가 안정적 여성취업의 커다란 걸림돌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87년 제정된 남녀고용평등법에 따르면 생후 1년 미만의 자녀를 가진 여성근로자가 원할 경우 1년이내의 육아휴직을 할 수 있다.
또 여성근로자가 5백명 이상인 사업장에서는 의무적으로 직장 보육시설을 설치토록 되어있으나 거의 지켜지지 않고 있는 실정.
고용주들이 이같은 모성 보호조항을 지키려는 의지가 빈약한데다 육아휴직 문제로 고용주가 당사자에게 불이익을 주더라도 2백50만원 이하의 벌금만 내면 되는 등 제재조치가 미약해 법적 구속력이 거의 없는 형편이다. 따라서 상당수의 직장여성들이 갈망하는 직장 탁아시설을 갖춘 사업장은 6월말 현재 전국에 29개뿐이다.
언론계에서는 KBS가 올해 처음으로 노사 단체협약을 통해 직장내 탁아방 설치공간을 확보,올해말까지 남녀 노조원들이 어린 자녀들과 함께 출근할 수 있게 될 전망이어서 각별한 관심과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한편 전국 병원노조연맹·전국교직원노조·한국여성노동자협의회 등 7개 노조와 단체가 지난 6월 「직장탁아소 추진을 위한 연대모임」을 결성했다.
여성노동자회 왕인순 사무국장은 『직장 탁아시설은 여성 근로자들의 평생노동권 확보차원에서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기업의 좋은 이미지를 높이는데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상 권고규정에 그쳐 실효성이 보잘것 없는 시행령에 강제력을 부여하고 탁아소 설치대상을 중소기업·학교·병원·금융기관까지 확대하며 예상확보 및 세제상 지원 등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여성들은 문민정부가 거듭 천명해온 여성정책 의지에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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