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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5일 타계한 정계의 거목 故 백두진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故 白斗鎭씨는 自由黨및 共和黨정권아래에서 국무총리(52~54년,70~71년).국회의장(71,79년)을 각각 두차례씩 지낸격변기 한국정치의 산증인중 한사람이었다.
지난34년 東京大상대를 졸업한 뒤 韓銀의 전신인 朝鮮은행에 들어가 사회생활을 시작했다.정부수립후 외자청장등을 거쳐 총리서리.재무장관이던 53년 釜山피란시절 화폐개혁을 주도하고 韓美상호방위조약체결에도 역량을 과시했다.
56년까지 총리로 官界에 몸담았던 그는 4.19후 경기도이천의 보궐선거를 통해 5대국회에 진출.5.16후 긴 野人생활로 들어갔다가 7대국회(67년)에 共和黨전국구로 정계 복귀.
수출드라이브정책이 활기를 띠어가던 70년 朴正熙대통령은 경제전문가로 내외에 잘 알려진 白씨를 총리에 전격등용했다.白씨는「民間주도형 경제」「연좌제폐지」등 의욕을 보였으나 5개월반만에 실세 金鍾泌총리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대신 8대국회 (71년)의의장직을 맡았다.
이듬해초 共和黨의 保衛法제출에 맞서 야당인 新民黨이 白의장의사퇴권고안을 제출하고 7개월째 논란의 대상이 되자 그는『입법부책임자의 명예가 政爭의 제물이 될수 없다』며 사임서를 제출,파문을 일으켰다.
白씨의 사임동의안 국회표결은 共和黨의「백지투표」에 新民黨이 항의,再투표까지 하는 소동끝에 부결되고 말았다.
維新으로 국회가 해산된 뒤 73년부터 5년여 維政會의장을 맡았던 白씨는「유신학교교장」이라는 야권의 비난을 받는 가운데 다시 10대국회의장에 당선돼 억세게 官運이 좋은 인물로 꼽혀왔다.白씨는 10.26후 외부활동을 자제하며 漢江변아 파트에서 독서.TV시청.손님접견으로 여생을 보내왔다.의장시절 고령에도 영어사전을 옆에 놓고 外書를 읽었던 학구적 인물로 매사에 꼼꼼하고 기억력은 超人的이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春園 李光洙의 부인許英肅여사의 조카딸 許明哉씨(71)가 미망인.
〈崔 勳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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