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엔고 호기 못살린다/실명제이후 수출현장 점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하청업체 현찰요구 많아 자금난/품질향상 안돼… 철강등은 호조
신엔고현상과 금융실명제가 수출 현장에 어떤 파장을 던지고 있을까. 새 정부 출범이후 잇따라 내놓은 통관 간소화,소액수출의 수출승인면제,수출추천제도 축소 등 수출관련 행정규제 완화가 수출현장에서 실제 효과를 거두고 있는지도 궁금한 일이다. 수출현장을 직접 찾아 수출업계의 애로사항을 짚어보았다.<편집자 주>
일본·미국 등에 니트와 스웨터를 수출하고있는 서울 도화동 (주)신원의 정환철 해외사업 본부장은 요즘 납품업체 관리를 하다 혀를 차기 일쑤다.
전에는 납품업체에 주문을 주겠다고 하면 수많은 중소업체들이 몰려왔으나 요즘은 자금난·인력난 등으로 시큰둥한 반응들이다. 오히려 수출하청을 주는 기업이 사정조로 나서야 한다.
게다가 실명제후에는 중소업체들이 어음받기를 꺼려 현찰을 많이 챙겨 놓거나 납품업체들이 제2금융권에서 어음할인을 받을 수 있도록 직접 알선까지 해주어야 한다.
납품은 석달뒤에 되지만 한달만 지나면 노임 등에 쫓긴다며 전도금을 요구하는 납품업체들이 늘고있다는 것이다.
엔고현상과 관련,정 본부장은 『엔고라고 하지만 일본의 내수경기가 안좋아 생각만큼 일본시장이 좋은 것은 아니다』고 진단한다.
그는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는 경공업은 머리 아닌 몸싸움으로 버텨나갈 수 밖에 없다』고 털어놓는다. 바이어사무실에 한번 갈 것은 두번가고 공장에 1시간 다녀갈 것을 2시간 다녀가는 등 품질관리 노력으로 간신히 수출을 늘리고 있다는 것이다.
종합상사인 (주)선경 자금부의 한 간부는 『우리도 실명제후는 단자사 등에서 장기자금을 구하기가 어려운데 협력업체들이 현찰결제를 요구해 고통을 받고있다』며 『제2금융권에서 할인해 쓰던 무역어음도 제2금융권이 그 재원으로 쓰는 어음관리계좌(CMA)거래가 안돼 벽에 부닥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그러나 『중장기적으로는 돈이 제도권으로 유입돼 수출업체의 금융비용이 줄어들 것으로 생각한다』고 기대했다.
또한 EJ Company의 대표 김선경씨는 『실명제후 해외송금 규제가 강화되면서 수출업계가 수출커미션 등을 해외에 보내는데도 규제가 많아져 중소 수출기업들은 어려움이 크다』고 했다.
신발수출업체인 부산 금사동 부영화학의 한 간부는 또다른 평가를 했다. 그는 『대다수 수출기업들은 은행 네고자료가 노출되므로 이미 실명제를 하고있는 셈』이라며 『그동안 정상적으로 하는 수출업체는 세금 등에서 손해를 보아온 관행이 시정되는 등 실명제가 경제건전화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경제계의 기대와는 달리 엔고의 효과는 그리 신통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현대종합상사 박원진상무는 『엔고가 좋은 여건이나 품질경쟁이 되지않아 일본에 직접 수출하기가 어렵다』면서 『플랜트 수출같은 경우는 일본기업의 협력업체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업체가 사업을 따내지 못해 우리 물량도 줄고있다』고 말했다.
현대종합상사는 올해 수출을 20% 정도 늘릴 계획이었으나 7월까지 오히려 감소해 비상이 걸린 상태다.
박 상무는 다만 조선·자동차·반도체·철강 등 일본과 제3국에서 경쟁하는 품목에서는 우리 기업의 경쟁력이 높아지고 있다고 했다.
럭키금성상사의 경우도 7월말까지 수출신장률이 거의 제자리 걸음이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하반기에 일본이 전기·전자 등 제품의 가격을 올릴 전망이어서 연초 목표인 7% 증가는 달성할 것으로 보고있다.
수출 관련 규제완화는 일부효과가 나타나고 있으면서도 현장에서는 여전히 걸림돌이 되고있는 대목들이 많다.
부산 부영화학의 수출팀은 『수출절차 관련 뒷돈이 없어지고 수출검사도 생략사례가 많아지는 등 일부 개선되고 있는 조짐은 있다』면서도 『정부가 소액수출에 대해서는 수출승인을 면제한다고 발표했으나 지역별 쿼타 등 다른 규제요인이 있어 한 건도 면제받아 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런가하면 (주)신원의 채종대대리는 『수출추천 등이 수월해지기는 했지만 서류 만드는 양은 옛날과 마찬가지이며 제품비자 재발급·보세운송·샘플통관 등에서의 쓸데없는 지연·간섭은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럭키금성상사의 송현재차장도 『세관의 재량권이 전향적으로 행사되는 변화는 있다』며 『그러나 가령 계속 수출품목에 대해 포괄수출승인제를 시행한다고 했지만 네고를 위해서는 별도로 수출면장을 받아야 하므로 실효가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결국 엔고의 호기를 제대로 활용하려면 실효성있는 규제완화와 함께 제품의 품질경쟁력 강화가 시급하다는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김일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