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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명제시대문화>상.미술-시장 양성화 한가닥 기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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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국내 유일한 미술품 견본시장인 93화랑미술제가 열리고 있는 24일 오후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사나운 빗줄기가 한차례 내리쏟은 탓인지 이날은 다소 썰렁한 편이었으나 지난 19일 개막이래 공식입장객수만 8천명을 돌파해준비한 관람권이 동나는 바람에 재인쇄에 들어갔다는 주최측의 설명이다.그러나 65개 부스 가운데 자리를 지키고 있는 화랑주는거의 드물어 그것이 「공허한 열기」임을 짐작케한다.
『가족끼리 오거나 방학을 맞은 학생들이 전시장에 몰려들어요.
그러나 「작품감상」만을 목적으로한 관람객들이지,작품구입과는 거의 무관합니다.』허성 한국화랑협회사무국장의 말.
『사실 고객들에게 전시장에 나와보라고 전화를 걸고싶어도 혹시해가 돌아갈까봐 두려워 그만두었어요.말인즉 「투기성 고액구매자」에 대해서 자금출처를 조사하고 관련사업체도 특별세무조사를 한다지만 그 기준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잖아요.』 전 시장 2층에 부스를 차려둔 한 화랑주는 「현대판 암행어사」인 세리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 기준을 적용할까봐 걱정이 태산이다.
금융실명제 이후 나타나고 있는 미술시장 위축은 화랑들의 기획전 취소나 연기로 점차 확산되고 있다.뿐만 아니라 스스로 발표기회를 마련해둔 작가들까지도 움츠러들어 전시회를 미루거나 동료작가들로부터 그만두라는 권유를 받고 있다.
기획전시만을 하고 있는 K화랑이 9월 전시예정이던 국내중진서양화가 H씨의 전시회를 취소한 것을 비롯,H.S화랑등 다수가 실명전환 기간 이후로 전시회를 연기했다.서울의 P화랑주는 『작품 실거래 내용과는 별도로 기획전의 숫자도 과세지 표가 된다는소문이 있다』면서 앞으로 기획전이 상당수 줄어들 것으로 예측했다. 9월초 개인전을 마련한 한국화가 L씨는 『주위에서 하필 이런 때 발표할 필요가 있겠느냐며 만류했으나 외부상황에 너무 휩쓸려서는 아무것도 안될 것같아 열기로 했다』면서『생활은 고사하고 액자료나 도록제작 등에 드는 부대비용이라도 건질 수 있어야 할텐데 사실 걱정이 크다』고 털어놓았다.
전시회를 통한 중견작가들의 작품발표가 종전보다 드물어지는 것은 실명제 이후 나타나고 있는 변화중의 하나다.
9월초 C화랑의 초대전을 갖는 서양화가 K씨는 『전시일정을 놓고 논란이 많았었다』며『해마다 한차례씩 작품발표를 갖는 것도특별관리대상으로 주목받을까봐 신경쓰이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실명제시대를 맞이한 미술계는 단기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전시회의 양적 감소와 함께 미술문화예술 전반에 걸쳐 변모를 거듭할 것으로 보인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미술시장의 양성화다.
미술계 일각에서는 미국이나 유럽등 선진 국가들의 예에 비추어볼 때 미술품 경매제도의 정착으로 블랙 머니를 화이트 머니로 전환시키는데 미술시장이 주요한 기능을 할 것이라는 전망을 하기도 한다.
또 작품구매에 대한 기업들의 세제감면혜택 등의 조치와 함께 소비자가 작품을 구매할 때 이에 대한 일종의 부가가치세를 직접물도록 하는 미술품 관련세제가 새로이 마련될 수 있을 것으로 미술계는 기대하고 있다.현재 미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소비자간접세는 사업자등록이 돼있는 곳을 통해 작품이 거래되도록 함으로써작가들의 음성거래를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화랑들로 하여금 성실한 세무신고를 하게 하는 장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작가들의 창작 활동과 관련한 미술계의 변모 가운데 가장 크게점쳐지는 것이 판화장르의 급부상이다.
판화는 대량복제가 가능해 싼 값에 유명작가의 작품을 구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실수요자들은 작품값을 신용카드로 결제하거나 할부구매하는등 대금지불 방법도 바뀌어질 것으로 보인다.
또 장기적으로 작가 스스로 여는 전시회는 점차 자취를 감추고미술관이나 화랑에서의「신예 발굴을 위한 기획전」이 활발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반면 대학을 무대로 한 학생들의 작품 발표가 활발해지고,신예로서의 자리매김을 하기 위한 공모전 참여 또한 더욱 활기를 띠게 될 것으로 보인다.
미술문화육성 차원에서 세제감면 조치 등이 강구되면 사설미술관의 설립은 크게 활발해져 투기로서의 미술품이 아닌,대중이 함께보고 즐기는 미술문화생활이 열리게 될 것이다.
〈洪垠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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