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수 못본 서 9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호사다마인가. 「제2기 응씨배」를 획득, 바둑 황제로 등극한 서봉수 9단이 단수를 못 보고 「다 이겼던 바둑」을 놓쳤다 하여 화제다. 그것도 한 판도 아닌 두 판씩이나 그랬으니 이게 웬일인가.
왕위전 도전자 선발리그에서 상대인 최규병 6단이 대마를 단수 쳤을 때 서9단은 유유히 손을 빼서 다른 곳에 착점했고, 이에 최6단은 『죄송합니다』라며 서9단의 돌을 들어냈다. 또 한판은 MBC제왕전의 2차 예선 결승에서다. 상대인 김희중 8단이 단수친 상황에서 또 손을 뺐던 것.
위기구품에 의하면 9단의 별칭은 인신이다. 말 그대로 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초심자도 아는 단수를 못 보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혹자는 『정응씨배 우승 상금 40만 달러(약3억 2천만원)를 챙기더니 헝그리 정신이 흐려진 모양』이라고 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그게 아니다.
서9단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 항상 허름한 옷차림에 김치찌개 백반 등 값싼 토속 음식을 즐기며 바둑 외길의 자세가 여전하다.
제로 센스라는 것이 있다. 순간적으로 사고력이 마비되는 상태를 가리키는 전문용어다. 그것은 눈 깜짝하는 찰나인 것이 보통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엄청난 사고가 벌어질 수도 있다. 수백명 승객의 생명을 책임진 점보 여객기의 조종사가 결정적 순간에 제로센스 상태에 빠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처음에는 스스로 영문을 몰라하던 서9단도 필자의 설명을 듣고서야 자신이 바로 제로센스상태였던 것 같다며 비로소 의문이 풀리는 눈치다.
그러면 어째서 그런 정신적 공백 상태가 일어나는가. 필자의 어림짐작으로는 피로와 잡념이 원인일 듯 싶다. 사실 서9단은 응씨배를 차지하느라 정신적 극한 상황 속에서 피로가 쌓을대로 쌓였다.
조치훈 9단과의 준결승 제3국(타이베이)때는 장출혈로 하루종일 물만 먹고 싸웠으며 오타케 히데오 9단과의 결승 5번 승부 제3,4,5국 때는 적도 부근에 위치한 찌는 더위의 나라 싱가포르에서 혹사당했지만 누적된 피로를 풀어주지 못하고 각종 공식 대국에 시달려 왔다.
지나치게 승부에 집착해도 단수가 안 보이는 법이다. 과거 조치훈 9단이 18세 시절 당시 일본 제일의 고수였던 사카다 에이어 9단과의 일본 기원 선수권전 결승 5번 승부에서 2승 후 3패로 우리를 안타깝게 할 때도 그런 현상이 일어났었다.
그때 5급 기력의 동양방송 김덕보회장(작고)은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하며 기보를 놔보고는 『나도 보는 수를 조치훈이 못보다니…』라고 탄식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