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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잃어버린 '과학'을 찾아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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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오랜만에 거물급 행정의 달인이 과학기술부의 수장이 되어 청와대는 물론 우리 과학기술계도 큰 기대를 안게 되었다. 특히 과학기술부가 산업자원부와 정보통신부를 이끌며 '과학기술정책, 산업정책, 과학기술인력 양성 등을 부총리급 위상에서 총체적으로 기획 조정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진정 가슴을 설레게 한다. 지난 몇년간 줄기차게 과학기술의 발달만이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다고 떠들어온 나 또한 큰 기대를 품고 있다.

하지만 큰 기대 속에 작은 우려가 하나 있어 너무 늦기 전에 '쓴 소리' 한 마디만 하려 한다. 오명 장관이 비록 부총리는 아니더라도 부총리급의 역할을 해낼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산자부 장관과 정통부 장관의 같은 대학(서울대 공대) 같은 학과(전자공학과) 선배라는 점이다. 학연이 늘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데 나도 동의하고 싶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학연보다는 학문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 세 장관 모두 기술분야의 사람들이다. 여기다 역시 서울대 공대 교수 출신인 김태유 청와대 정보과학기술 보좌관까지 합하면 완벽하게 공학자들만의 무대다.

그렇지 않아도 '과학기술부'라는 이름에서 '과학'은 늘 형용사의 위치를 면하지 못해왔다. 물론 '과학 및 기술부' 또는 '과학과 기술부'라고 부르기가 너무 거추장스럽다는 점은 나도 이해한다. 그러나 과학기술부 예산의 80% 이상이 늘 기술 쪽에 주어진 것만 보더라도 과학을 그저 기술의 발전을 위해 양념처럼 조금씩 해왔을 뿐이라는 비판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같은 언어의 폭력적인 상징성을 걱정해야 할 일이 이번에도 벌어지고 말았다. 오명 장관의 위상을 얘기하며 정부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그를 '기술부총리'라고 불렀다. 과학은 아예 이름에도 끼지 못했다.

몇년 전 우리 정부는 세계 20위권인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경쟁력을 5년 내에 10위까지 끌어올린다는 목표로 정보기술(IT), 생명공학(BT), 나노공학(NT), 환경공학(ET), 우주항공공학(ST), 문화콘텐츠(CT) 등 6개 분야를 유망 미래기술분야로 선정, 향후 5년간 35조원을 투자할 계획을 수립해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이 6개 분야의 이름에도 한결같이 기술(technology)만 있고 과학(science)은 없다. 이들도 사실 NST(Nano Science and Technology), EST(Environmental Science and Technology) 등으로 불러야 한다. 잃어버린 '시간' 안에서 인간을 찾으려 했던 프루스트처럼 이제 우리도 잃어버린 '과학' 안에서 미래를 되찾아야 할 때가 되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공계 위기'는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로 시작된 기초학문의 위기, 즉 '이(理)'의 위기가 드디어 '공(工)'의 위기를 부른 것뿐이다. 이공계 위기는 본질적으로 기초학문의 위기다. 기초과학이 제대로 서면 기술 발전은 자연히 따라온다는 것쯤은 이제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산자부.정통부와 호흡을 같이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산자부와 정통부가 어차피 기술분야를 책임지는 부서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기회에 과기부는 기술보다 오히려 과학에 더 큰 비중을 두는 부서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연구개발 예산의 국민총생산 대비 비율이 선진국들에 비해 그리 낮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다. 비율을 높이기 어렵다면 비율 조정이 필요할 것이다. 이번 기회에 과기부의 예산은 기술보다 과학에 쓸 수 있도록 조정되었으면 한다.

오명 장관님. 스스로 밝히신 대로 이 나라를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로 이끄는 견인차가 돼 주십시오. 장관님의 풍부한 경험과 강력한 리더십을 믿겠습니다. 다만 6개월 내에 우리 과학기술 전반의 큰 그림을 그리신다는 소식에 서둘러 한 말씀 드렸습니다. 기우에 지나지 않겠지만, 부디 '공(工)'만 간신히 물 밖으로 건져내고 '이(理)'는 여전히 익사 상태로 남겨놓는 우는 범하지 말아 주십시오. 과학이 앞서야 기술이 따라옵니다.

최재천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