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법혐의없어 논란여지/전대통령 서면조사 어떤 의미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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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청와대·민자등 “과잉조치” 비판 만만찮아/감사원 “재임중 의혹 소명기회 제공” 강조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전달된 감사원의 질의서는 몇가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우선 이미 우리나라 역사상 전직대통령이 재임중 행한 업무로 인해 국가 사정기관으로부터 조사를 받는 첫번째 사례가 됐다.
89년 최규하 전 대통령이 서울대병원에서 검사로부터 피고발인 조사를 받은 적이 한번 있기는 하다. 증인출석을 거부한 최씨를 국회 광주특위가 고발했던 것이다.
혐의가 재임중 업무와 관련된게 아니었으므로 정식조사로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전 전 대통령이 5공비리 청문회에 불려간 적도 있으나 국회 국정조사였지 국가기관조사는 아니었다.
둘째로 이번 질의서는 전직대통령에 대한 조사가능성의 범위를 넓혀 놓았다는 점이다. 전직대통령 조사문제를 놓고 청와대·민자당(반대)과 감사원(추진)은 수개월간 맞서왔다. 논란의 핵심은 과연 조사할만한 뚜렷한 범법혐의가 있느냐였다.
두 전 대통령에게 던져진 질문들은 비위혐의와 관련된게 아니다. 『돈을 받거나 법을 어겼지 않느냐』가 아니라 『왜 그때 그렇게 일을 잘못 추진했느냐』를 추궁하는 것이다. 따라서 질의서은 뚜렷한 범법·비위혐의가 없더라도 전직 대통령의 재임중 업무가 큰 실수였거나 국민의 의혹을 산다면 조사대상이 될 수 있다는 선례가 됐다.
이 부분은 새로운 논란의 불씨를 제공하고 있다. 적잖은 청와대·민자당 관계자들은 『범법증거가 없는데도 전직대통령을 조사하는 것은 과잉조치』라며 감사원을 비판하고 있다. 두 전 대통령측은 물론 잔뜩 격앙되어 있다. 『법을 어긴 것도 아닌데 전직대통령을 죄인취급한다면 누가 자신있게 통치하겠느냐』고 감사원을 성토했다. 전 전 대통령의 한 측근은 『이회창 감사원장이 무책임한 여론에 끌려다니거나 아니면 영웅심리에 빠져있는 것 아니냐』고 비꼬기도 했다.
이 원장과 감사원은 이번 질의서 전달이 범법사실 규명이라기 보다 소명기회 제공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한 고위관계자는 『범법이 없더라도 평화의 댐과 전투기 기종변경은 의혹으로 둘러싸여있다』며 『특감을 시작한 이상 최고결정을 내렸고,가장 책임있는 두 전 대통령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감사원의 논리전재를 뜯어보면 사실규명보다는 「절차완성」이라는데 상당한 역점을 두고 있는 듯하다. 예를 들어 전씨의 답변이 없어도 평화의 댐과 관련된 사실은 거의 밝힐수 있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노 전 대통령의 경우도 실무진에서는 미국측의 율곡사업 관련자료가 오지 않은 상태에서 지금까지의 감사결과로만 보자면 특별히 조사할게 없다는 의견도 다수 있었다.
F­18을 F­16으로 변경한 것이 F­18을 결정했던 근거보다 미약하다고는 하지만 그 과정에서 불법커미션을 수수했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한 관계자는 『제보가 많았지만 확인된 것은 하나도 없다』고 밝혔다.
감사원은 조사여부를 결정하면서 무척 고심해다. 빨리 내용을 공개하라는 여론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질의서가 전달된 후까지 이를 밝히지 않았다. 이 원장이 일찍이 기자회견에서 조사가 가능하다는 판단을 천명한 것이 전부였다.
감사원은 이번 결정을 내리면서 여론을 의식한 흔적이 많다.
여론을 의식해 불필요한 영역이나 대상까지 감사 또는 조사를 했다면 이는 감사원이 정치권력으로부터 쟁취하려는 독립성 확보에 나쁜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김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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