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에 속타는 사연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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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야채팔아 모은 2억 낭비벽 아들이 알면 어쩌나”/아내 이름으로 맡긴 5천만원 세추징 고민/사원명의 비자금 수억원… 법정싸움 걱정도
8·12 금융실명제 시행이후 각 은행·증권사 등 금융가와 언론사에는 「실명제 고민」을 털어놓으며 자문을 구하는 전화문의·방문상담이 줄을 잇고 있다.
실명제 발표직후 5명의 직원으로 편성된 재무부의 금융실명제 실시단에도 하루평균 4백∼5백통의 문의전화가 빗발쳐 직원들 사이에서 『아예 실명제 고민상담소로 간판을 바꿔달라』는 농담이 나돌 정도다.
문의자들이 털어놓는 고민들은 대게 딴사람·가공인물 명의로 갖고있는 계좌를 어떻게 처리해야 좋겠느냐는 등 결론이 뻔한(?) 질문들. 그러나 기막힌 사연,억울한 사연들도 적잖게 쏟아지고 있다.
지난 20년 가까이 야채장사 등을 해가며 모은 돈 2억여원을 외아들 이름으로 통장에 넣어두었다는 한 60대 할머니는 16일 오전 10시쯤 거래은행인 S은행 서울 재동지점을 찾아가 아들 모르게 돈을 찾을수 없겠느냐고 호소했다. 이 할머니는 『아들이 건달들과 어울려 다니며 망나니짓만 하고 있는데다 낭비벽이 심해 정신차리면 주려고 아들 몰래 저금해 왔는데 실명제 때문에 탄로나게 생겼다』면서 『아들이 알면 얼마안가 탕진해 버릴 것은 물론 그동안 용돈을 달라고 조를 때마다 없다고 시치미를 떼왔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하소연,은행관계자들을 안타깝게 했다.
김모씨(52·운송업·서울 갈현동)는 『H은행 명동지점장으로 있는 친구가 통장을 여러개 만들면 세금우대를 받을수 있다며 돈을 맡겨달라고 해 예금유치 실적도 올려줄겸 12일 오후 6천5백만원을 맡겼으나 불과 몇시간뒤 실명제 시행이 발표됐다』면서 『본의 아니게 검은돈의 소유자인 것처럼 오해를 받게 돼 고민』이라고 말했다. 또 Y산업 인도네시아지점장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40대 남자는 15일 오전 본사로 전화를 걸어와 『장차 개인사업을 해볼 생각으로 아내도 모르게 월급통장 이외에 따로 가명계좌를 갖고있다』며 『10월12일까지 실명계자로 전환하려면 국내에 나가야 하지만 출국한지 얼마안돼 시간을 내기도 어렵고 혹 회사측으로부터 공금을 빼돌린 것 아니냐는 오해를 받을까봐 걱정』이라고 털어놓았다.
오모씨(48·여·서울 연희동·미용실주인)는 『독일에 유학중인 딸의 결혼밑천을 위해 딸이름으로 적금을 부어 3천만원이 넘었으나 급히 쓸 곳이 생겨 해약해야하는데 은행에서 본인이 아니라고 거절할것 같아 잠이 안온다』고 했다.
또 이모씨(43·자영업·서울 방배동)는 91년 12월 부인명의로 한국투자신탁에 장기공사채형 수익증권으로 5천만원을 들어놓았으나 실명전환을 하자니 세금이 많이 나오고 그대로 두자니 나중에 부인이 찾을 때 자금출처조사를 당할것 같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모그룹 자금담당 이사는 『비자금 마련을 위해 몇몇사원들 명의로 수억∼수십억원씩 든 차명계좌를 터놓고 있으나 만일 본인들이 자기것이라고 우길 경우 사실관계확인을 위해 법정싸움까지 피할수 없는 실정』알며 『다른 기업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귀뜸했다.
한편 재무부의 한 관계자는 이에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많은 돈만 갖고 있으면 죄다 세금 추적을 받는줄로 알고 오해하고 있다』며 『실명제는 뇌물 등 검은 돈의 흐름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출처가 분명하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신성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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