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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큐브릭 파격적 형식미의 최고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87년 예측 불허의 파격적인 베트남 전 영화『장탄적재』이후 전혀 활동이 없었던 스탠리 큐브릭이 신작 제작에 돌입했다는 소식이다. 외신에 따르면 매스컴과의 접촉을 끊은 채 런던근교에서 은둔하고 있는 이 괴팍스런 거장은 공산주의체제가 붕괴된 동구사회를 소재로 하는 신작을 폴란드·체코 등지에서 올 하반기에 촬영할 예정이라는 것. 혼란스런 동구사회에서 방황하는 한 소년과 젊은 여인을 주인공으로 한다는 이 신작은 아직 제목조차 정해지지 않았지만 내년 가을 전 세계 개봉을 목표로 제작될 계획이라고 한다.
한때 미국영화 사상「오슨 웰스 이래 최고의 천재」라는 말을 듣기도 했던 그가 과연 얼마나 이름 값을 해낼지 벌써부터 팬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특히 화제에 오르는 것은 비행기 공포증으로 유명한 그가 이 신작을 위해 직접 동구에까지 날아간다는 대목이다.
큐브릭의 영화를 한 마디로 말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의 대표적인 몇몇 작품을 들어 거칠게 말하자면 그것은 영하란 매체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바탕으로 관객의 정서를 송두리째 사로잡는 그 파격적인 스타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탁월한 형식미로 그가 관객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모든 인간행위에 대한 깊은 염세주의다. 그의 주요작품을 한번이라도 본 관객은 우선 그 시각적인 충격효과에서 쉽사리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에 금방 동의할 것이다.
1928년 뉴욕에서 태어난 큐브릭은 그다지 여유가 없는 집안에서 성장, 정규교육보다 오히려 책을 통해 지식을 쌓았다. 낮에 직장을 다니면서 뉴욕시립대 야간과정을 마친 그는 잠시 『룩』등의 잡지에서 사진기자로 일하다 50년대 초반 영화계에 입문한다, 몇 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실력을 다진 그는 56년 가장 뛰어난 필름 누아르의 하나로 손꼽히는『킬링』으로 주목을 받는다. 경마장 판돈을 강탈하려던 갱단의 실패를 치밀하게 묘사한 이 영화는 플래시백의 중복사용 등 독특한 시간 구조가 인상적인 작품으로 스타일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이 이미 드러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57년 커크 더글러스가 주연을 맡은 박력 있는 반전영화 『영광의 길』로 그의 명성은 부동의 것이 된다. 그러나 이어지는 스펙터클역사물『스파르타쿠스』는 이 야심만만한 청년작가에게 큰 상처를 남긴다. 주연이자 제작자인 커크 더글러스의 지나친 간섭으로 감독으로서 충분한 통제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때의 쓰라린 경험은 그로 하여금 완전한 예술적 자유가 없이는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한다.
60년대 들어서도 냉전적인 단순사고를 통렬치 풍자한『닥터 스트레인지 러브』, 그때까지 경시되던 장르인 SF를 일거에 철학적 사유의 매개체로 끌어올린『스페이스 오디세이』등을 내놓으면서 그의 명성은 전세계적인 것이 된다. 62년 영국으로 이주한 그는 자신의 국제적인 성가를 최대로 활용해 메이저 사들과 계약, 대규모 예산으로 자신이 만들고 싶은 대로 영화를 만든다는, 미국영화작가로선 누구도 꿈꾸지 못했던 특혜(?)를 누리면서 전성기를 구가한다. 특히 4백만 년 전의 유인원에서 시작, 2001년의 목성탐험으로 이어지는 문명사의 거대한 도정을 보여주는『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우주공간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엇인가를 탐구함으로써 SF자체를 재 규정한 영화로 꼽힌다, 더구나 이 영화는 환각적이기까지 한 우주공간의 묘사가 유토피아적인 것을 추구하던 젊은이들의 욕구와 맞아떨어져 당시 청년문화의 상징으로 떠올랐던, 문화사적인 작품이다.
80년대 큐브릭은『샤이닝』『장탄적재』등으로 왕년의 명성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작품을 발표했다. 그러나 일각에선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영화 테크놀러지의 광적인 집착에 대한 우려도 나오고 있다. 상황 속의 인간에 대한 탐구는 뒷전으로 내몬 채 자기 탐닉 적인 테크닉의 유희를 즐긴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내년에 선보일 신작에서 그가 과연 어떻게 응답할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임재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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