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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 새 지평 열릴까/우리정부 전략과 전문가 진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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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일 정권 세대교체로 파악 시장논리로 접근/빗장걸기 보다는 기업자생력 키워 정면돌파
『일본에 배상을 요구하지 않겠다. 대신 사과와 함께 역사적 교훈으로 삼겠다고 약속해달라.』
정부가 출범 불과 한달만인 지난 3월말 발표한 이른바 「군위안부 국내조치」 내용중 일부다.
당시 한국 군대위안부 한사람당 20만엔(한화 약 1백20만원)을 배상해주기로 하고 실무작업을 폈던 것으로 알려진 일본정부는 놀라워했다고 한다.
『변화하는 일본과 부닥쳐 나가기 위해서는 더 이상 일본에 손을 벌릴 것이 아니라 일본의 양심을 걸어 과거사 문제는 역사규명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외무부 당국자의 제안에 김영삼대통령이 『새 정부가 할일이 바로 이런 것』이라며 결단을 내렸다는 후문이다.
그후 군위안부 문제의 종결선언이나 대일 외교정책의 경제논리로의 전환 등 잇따른 발표가 있은후 돌이켜보면 이는 우리 정부의 대일 외교정책 방향이 선회하는 신호탄인 셈이었다.
정부 관리들의 말도 이를 확인하고 있다.
외무부 유병우 아주국장은 『굴절된 과거를 하루 빨리 정리하고 정부 대 정부,외교 대 외교로 맞설 때가 왔다』고 말한다. 『우리가 특수관계에 있다는 발상에서 벗어나 「내가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한일관계』를 그는 말한다.
한국정부의 이같은 발상전환은 과거 국민여론에 편승,현실이나 실리와 동떨어진 대일정책을 펴다보니 결국 국익에도 보탬이 되지 않았다는 판단에서 비롯됐다.
연세대 이기택교수(정치학)는 『우리가 북방정책을 펼때 일본은 남방정책을 펴 동남아 시장을 자신들의 독무대로 만들었다』면서 『우리가 일본이라는 이유로 특수품목의 수입을 막았더니 싱가포르·홍콩에서 만든 일본 전자제품들이 용산으로 싼 가격에 밀려와 우리업체가 피해를 보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해 정부의 발상전환에 기본적으로 동의했다.
과거에 연계하거나 정치논리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시장논리로 정면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게 이 교수의 주장이다.
정부의 대일정책 전환은 일본에 젊은 세대의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더욱 가속도가 붙은 듯하다.
자민당에서 비자민당으로 바뀐 것을 단순한 정권교체가 아니라 세대교체로 파악한 정부가 일본의 냉전후 새 질서체제 구축 분위기에 맞춰 새 관계를 주도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 정부내에 우세했다는 것이다.
한승주 외무장관은 일찍이 『어쩌면 과거사를 귀담아 들어줄 일본 정치인은 미야자와 기이치(궁택희일)가 마지막이 될것』이라고 전망해왔다. 국민대 한상일교수(정치학)는 『한국은 일본의 정치변화만 보고 있지만 일본사회 전체의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고 전제,『일본은 냉전 종식후 새로운 국제상황에 걸맞지 않는 국내 체제가 붕괴하고,보다 역동적인 체제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는만큼 일본의 변화 자체를 거시적인 안목에서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근본적인 대일정책의 변화가 한일관계에 긍정적 기여를 할 것이라고 보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두나라가 이를 계기로 경제문제에서 협력의 시대를 열고 문화·학술 부문 등에서 감정과 현실의 괴리를 정리한다면 서로 보탬이 될것이란 지적이다.
한 예로 정부가 일본영화 수입을 막고 있지만 그것들이 우리 거리에 넘치는 괴리를 정면외교를 통해 정리할 수도 있고 이는 우리국민들의 이중적 심리와 이에 따른 심리적 갈등을 해소하면서 젊은이들이 일본을 더 잘알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란 분석도 있다.
경제부문에선 단기적으로 적자증가 등 손실이 늘어날수 있지만 우리기업이 변하는 상황을 활용해 경쟁력을 키우려는 노력을 하고 대비한다면 장기적으로 득이 될 것이란 분석이 있다.
대우경제연구소 이한구소장은 『마침 일본이 산업구조 조정시기이기 때문에 현재의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하거나 일부 기기를 팔아야 하는데 이를 우리가 적극 유치하는게 전략적으로 유리하다』고 말한다.
위기의식이 한국기업들을 강하게 해줄 것이란 지적이다.
다만 경제논리로만 접근할 경우 문제점이 클 것으로 지적된다.
우선 지금까지도 대일 경제예속 문제가 거론돼 왔지만 이 문제가 더욱 심화될 것이란 점이다.
경제계는 우리가 푸는 만큼 일본도 푸는 시장 개방을 떳떳이 요구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는 앞으로 정치가 해야할 부분이고 정부와 민간부분은 대외경쟁력을 높이는데 힘을 쏟아야 할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는 『일본이 못들어오도록 문을 닫기보다는 우리기업 자생력을 키우도록 정부가 지원하고 기업도 구조조정을 통해 고도기술·소재부품산업에 과감한 투자를 한다면 한국기업들의 경쟁력이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일 양국이 정치·제도적인 관계개선을 떠나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다져나가려면 양국간 신뢰관계 구축이 절실히 요청된다는 지적도 있다.
오재희 전 일본대사는 『한일 양국에 새 정부가 들어서 양국 관계가 한층 발전해나갈 수 있는 환경과 분위기가 마련됐다』면서 『차세대를 짊어질 청소년들의 교류가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정부의 혁신적인 대일정책은 일본정부가 어떤 정책변화로 화답해오느냐에 따라 성공 여부가 판가름날 것이다.<박의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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