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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선진화 실험대 오른 일본/김용서교수(특별기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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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연정 끌어낸 「화의 정치」가 열쇠
일본총선을 전후해 이념과 이해가 서로 다른 7개 야당(8개정파)의 연립정권이 성립될 전망이 매우 비관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단시일내에 이루어내 출범시키는 것을 볼 때 「화의 정치문화」라는 일본의 무서운 측면을 새삼 느끼게 한다. 특히 주요 야당들이 합의해 총리직을 의뢰한 신생당이 스스로 소수파의 리더(호소카와)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며 일을 성사시킨 절묘한 타협의 기술이나 사회당이 이념까지 양보하며 타협하는 과정은 우리를 감동케 한다.
이 사건은 전후 일본 제2의 정치적 모험이며,역사적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제1의 실험인 종전직후의 사회당정권의 성립은 군국주의 특수상황,사회당의 경륜부족으로 단기집권의 실패로 끝났다.
많은 비난에도 불구,자민당은 이번 총선에서도 해산이전의 의석수를 지켰고 금권정치의 온상인 후원회조직이 절대적 힘을 발휘했다. 그런 의미에서 야당연립정권의 탄생이 한때의 물거품 같은 사건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아직은 불확실하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연립정권이 성립된 과정을 보면 일본정치 개혁의 가능성이 엿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한 현상을 어떻게 해석하고 전망하는 가에 있다.
우선 가장 중요한 자민당의 분열과 사회당의 몰락이라는 점이다. 냉전구조의 산물인 「55년 체제」(보수·혁신양당제도의 성립)는 냉정체제의 해소로 붕괴가 불가피하다는 논평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새로 약진한 신당들이 모두 자민당의 분파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보수주의는 오히려 확대 강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당의 붕괴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이미 60년의 안보투쟁이나 60년대말부터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부상하는 단계에서 사회주의 이념정당은 역사의 유물로 허상화되어 갔다. 다만 자민당에 대한 국민적 불만의 배설구로서의 보조역할이 그 수명을 연장시켜 왔을 뿐이다. 중도정당의 발생과 특히 신생정당의 출현으로 그 역할마저 끝난 것이다.
두번째 중요한 사실은 이번의 정변이 새로운 세대의 반란이라는 점이다. 많은 결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성공은 연공서열의 질서의식과 위계구조의 덕분이었다. 원로가 권위로 인정받는 일본적 수직사회의 장점은 축적된 지혜가 지배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젊은세대는 변화에 민감한 대신 인내력이 약하고 경박한 실수의 단점이 있다. 결국 권위와 논리보다 힘으로 해결하는 시대를 개막시켰는지 모른다.
그러나 일본의 국민과 지도자들은 지극히 계산적인 상업국가적 국민이므로 명분이나 이념에 집착하지 않고 사태가 악화될 징후가 보이면 금권정치에 불만은 있어도 자민당정권으로 복귀할 선택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연립정권의 구성원들 역시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위기의식 때문에 매우 신중히 개혁정책을 추진해 갈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번 기회는 일본의 정치발전에 매우 유익한 경쟁의 시장메커니즘을 형성시켰다고 할 수 있다.
세번째 중요한 사실은 지금 일본의 개혁논의가 대체로 금권정치의 부패개혁과 선거제도 개혁에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국제적 공헌은 구체적으로 논의되지도 않고 또 논의될 수도 없다. 자칫 PKO문제나 헌법9조 논쟁으로 연계될 경우 간신히 성립된 연립정권의 합의를 다시 동요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자민당도 국민부담의 인상을 줄 우려 때문에 그에 대한 논의를 정치적으로 현명한 처사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가령 한국에 대한 군대위안부문제에 공권력의 개입을 인정하면서도 보상은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것도 그러한 입장의 일환일 것이다. 흔히 자조적인 「섬나라 근성」이나 동질성의 폐해라고 지적되는 옹졸성과 편견을 극복할 때 비로소 일본정치의 개혁이 제대로 자리잡혀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연립정부는 일본이 이질성을 수용하고 타협·조화시켜가는 귀중한 제1차적 경험이 실험이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제 일본의 정치가는 아시아의 정치가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지금까지 일본의 안과 밖을 구별하는 애국적 실리주의가 정치가의 자질요건이었다면 이제는 보편원리에 충실한 세계시민적 자질을 갖춘 정치가가 나설 시대가 된 것이다.
일본의 약체연립정부는 국민의 지원도 필요하지만 외국의 지원도 전례 없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미국은 이미 선거전부터 자민당만을 의존해 오던 종래의 대일정책을 다당화의 분열통치정책(divide and control)으로 바꾸었다. 한국은 미국과는 다른 입장이지만 같은 개혁정치의 주체라는 점에서 매우 좋은 인상을 주고 있다. 그간 소원했던 양국관계의 개선에 절호의 찬스가 왔다. 이런 때 일수록 일본전문가의 부족함을 느끼지만 민과 관을 총동원해 대일정책 수립의 수준을 높이는 민감한 적응력을 발휘해야 하고 그런 체제를 갖추어가야 할 것이다.<후쿠오카에서><이대·현 일본 구주대 교환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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