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38)장세동 실장 "심기 경호" 명분 국정 깊이 개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장세동 경호실장에게는 전두환 대통령 한사람만이 전부였다. 전대통령의 안전만이 유일한 관심사였다. 경호의 대상은 대통령의 신체적 안전문제로 국한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그러나 장 실장은 신체상의 안전확보에다 심리적 편안함까지 살피는 이른바 「심기경호」를 덧붙였다. 장 실장의 이 같은 심신의 2중 완벽경호방침은 전대통령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함을 안겨주었다. 그로 말미암아 권위주의 체제가 한층 강화되면서 예산의 낭비 등 여러 가지 폐단을 야기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장씨는 경호실장 역할에 대해 『통치권자가 어떤 사태를 판단·결심·조치를 취하는데 있어 초크(점등)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83년 5월 중국민항기 춘전비행장 착륙사건 때 즉각 외무부·국방부를 비롯, 대북 관계·대테러 조직에 비상을 걸었다. 그는 이것을 대통령의 상황관리를 위한 점등행위로 이해했다.
장 실장은 그런 초크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경호업무의 완전 무결을 강조했다. 전대통령을 조금도 불편하게 만들지 않겠다는 「불편지수 0」을 목표로 한 그의 경호자세는 경호업무를 벗어나 정무영역에까지 확대됐다.

<「불편지수0」목표>
전대통령 측근 A씨의 회고.
『전대통령은 조직의 긴장과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현장확인을 중시했지요. 헬기를 타거나 자동차로 현장에 갈 때 호기심이 어떻게나 많은지 여러 가지를 묻습니다. 가령 댐이 보이면 저수량이 얼마냐, 발전량이 얼마냐 하고 그리고 산을 깎아 골프장 만드는 것을 보면 누구거냐, 주변경관과 조화 문제 등을 물었지요.
그래서 경호실 기획과에선 아예 지도를 놓고 전대통령이 관심을 가질만한 공사현장이나 댐에 관한 모든 것을 파악해놓고 자료를 수집했지요. 장 실장은 수첩에 적어놓고 질문에 대비하는 것을 습관화했습니다.』
불시에 순찰을 하다보니 장관과 관련 기업체장들의 연락처와 동향을 파악해놓는 것도 점차 경호실의 주요업무가 되었다.
전대통령이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궁금증이 일어나지 않도록 즉석 답변에 만전을 기하겠다는 장 실장의 의욕은 장관의 브리핑 현장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경호실 출신 Q씨의 기억.
『장 실장은 비서실을 통해 4, 5일전 대통령의 장관면담 일정을 알아놓고 또 다른 준비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상공·재무장관의 면담이 예정돼 있으면 수출량, 통화량, 10대재벌 매출액에서부터 남대문시장 배추 값 등 전대통령이 관심을 가질만한 대목을 역시 수첩에 잔뜩 적고 또 열심히 외웠지요.
대위 때부터 전대통령을 모셨으니 취향이나 관심수준에 대해 남보다 잘 알 수밖에 없지요. 가령 대통령이 「올해 대미 신발수출이 얼마냐」고 갑자기 물으면 장관이 막힐 때가 있지요. 그때 배석한 장 실장이 얼마라고 수치를 정확치 댑니다.
그러니 전대통령도 「야, 장 실장 대단하다. 장관이 기억 못하는 것도 다 안다. 역시 옆에 데려다 쓰길 잘했다」고 감탄하게 마련이었지요.』 장 실장은 이 같은 준비를 넓은 의미의 경호업무로 파악했다. 국가원수가 국정수행을 하는데 있어 필요한 정보와 자료를 잠시라도 막힘 없이 제공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을 당하는 장관들은 벌레 씹는 입장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이에 대한 불만이나 비판이 권부 내부에서 없을 수가 없었다. 물론 불만과 비판은 뒷자리에서 수군대는 수준이었고 장 실장 앞에서는 그의 환심을 사기에 바빴다. 하나회 출신장군 T씨의 회고. 『해당 장관이 수치나 통계에서 막힐 때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것을 옆자리의 경호실장이 답변하려고 애쓰는 것은 경호업무가 아닙니다. 크게 보아 경호실장의 월권적 태도라고 할 수 있지요. 장 실장은 그것을 완벽경호의 일환으로 대비했다지만 통치권자의 마음에 들려는 처신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지요.』

<테러 대비 병력 동원>
대통령의 보필 준비가 어느 정도였는가는 「된장국이나 쌈을 많이 해드려라」고 전대통령의 식성관리에서부터 지방숙소 청결 상태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신경을 썼던 점을 보면 충분히 짐작이 간다. C모 지사는 대통령의 지방숙소 청소가 제대로 안됐다고 장 실장한테 호된 꾸지람을 듣고 혼비백산한 적도 있었다.
이런 사례는 경호실의 분위기를 경직되고 고압적으로 비춰지게 했다. 5공 경호실은 대체로 과시적이고 노출위주의 경호에서 전반적으로 탈바꿈하지 못했다. 여기엔 군 작전개념을 여과없이 깊숙이 도입한 것도 부정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경호실 출신 Z씨의 설명.
『우리는 적의 위해 요소에 대한 개념부터 서구식 경호와 다를 수밖에 없지요. 우발적 정신병자에 의해 테러가 일어나는 서구와 달리 l·21사태처럼 군사작전의 테두리에서 발생하는 테러에 대비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군 작전개념이 도입됩니다. 70년대 차지철 실장이 민간인 신분으로 군과 간접협조체제를 유지했다면 현역이었던 장 실장은 직접 지휘 비슷하게 협조관계를 이뤘지요. 군 작전개념을 유연하게 도입하지 못해 경호실의 인상을 뜯어고치는데 미흡했지요.』
군 작전개념을 본격 도입한 하나의 사례는 82년2월 전대통령의 제주도 연두순시 때 특전사 직할 707부대를 동원한 것. 그러나 이 부대원이 탄 C123군용기가 한라산에 추락해 대원47명과 공군조종사 6명 등 53명이 숨져 심각한 문제점을 던졌다. 미국의 특수부대 델타 포스를 모방해 81년 3월에 만든 707 부대는 대테러를 주임무로 하는 특전사내 최정예부대.
『그때 납북됐다 돌아온 제주도 어부들을 우리 당국에서 조사해보니 북한이 전대통령의 제주도방문을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북한에서 어부들에게 대통령숙소가 어디냐, 공항의 경비정도, 도로사정 등을 물어본 것이 확인됐지요. 자연히 제주도 경호가 강화됐지요. 한라산에 무장공비를 침투시킬지도 모른다는 점에 착안해 대비했지요. 경호실 내부에서 현지지형에 익숙한 전투경찰을 동원할 것인가, 특수부대요원을 이용할 것인가를 놓고 논란을 벌이다 특전사요원을 장거리 침투훈련 삼아 동원키로 했지요.』(Z씨)
이 부대원을 태운 수송기는 악천후로 한라산 중턱에 추락했지만 당시 청와대와 국방부는 이 사실을 동계훈련중의 사고라고 감췄다. 6년이 흐른 지난 88년 국정감사 때 비로소 일반에 공개됐다. 유가족들은 『사고당시 항공기운항이 전면 통제될 정도로 기상이 악화돼 비행기가 뜰 수 없어 관할 전술공수비행단까지 두 차례나 청와대로 수송기 이륙 불가능을 건의했으나 청와대의 강제명령으로 이륙,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켰다』고 비통해 했다.

<당대표 제지 소동도>
완벽경호는 종종 과잉경호로 이어지고, 대통령이외 어떤 인물도 안중에 들어올 수 없었다. 칠순을 넘은 이재형 전 국회의장(작고)이 민정당대표시절 경호실 요원에 의해 수모를 당한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82년1월15일 당총재인 전대통령이 관훈동 민정당 당사를 찾아 별관강당에서 중집위원·국회의원·국장들을 모아 놓고 창당기념행사를 가졌다. 그때 사람들이 몰려 한쪽 구석에 밀려 서있던 이 대표가 전대통령 쪽으로 가려다 경호원이 팔을 붙잡고 제지하는 바람에 조그만 소동이 벌어졌다.
당시 대표보좌역 장경우씨(현 새한국당의원)의 기억. 『경호원이 팔을 붙잡자 이 대표는 얼굴 색이 변하면서 순간 노기를 띠었지요. 이 대표가 손을 뿌리치려하자 경호원은 막무가내로 계속 붙잡았고 그 광경을 장 실장이 보고손짓을 해서야 비로소 팔을 놓아주더군요. 행사가 끝난 뒤 이 대표는 「내 집에 대통령이 왔고, 경호원이 대표 얼굴은 알텐데 숨도 못쉬게 할 정도로 경호가 지나치다」고 언짢아했습니다. 나중에 장 실장이 사과전화를 걸어왔는데 이 대표는 「집안행사에 너무 심하다」고 불쾌감을 토로했지요.』
구 민정당의원 W씨의 회고.
전대통령도 경호의 과잉자세를 불평한 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경기도시찰을 끝내고 현지도민들과 점심자리에 서울호텔에서 날라온 3백 그릇의 음식을 보고 「도라지·더덕 등 토속음식을 먹어야하는 것 아니냐」고 꾸중한 적이 있지요. 그런데 장 실장은 그런 적당한 꾸중을 받는 것에서 역설적으로 자신의 경호업무가 완벽함을 확인하려는 듯 했지요. 전대통령도 그린 스타일의 경호를 즐겼다고 할 수 있지요.』 <26면에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