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신발로 일어선 부산재벌/양정모씨·국제그룹 스토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70년대 급성장 국내 7위그룹 도약/무리한 사세확장 부채 못견뎌 몰락
국제그룹은 신발로 일어섰다고 해서 「고무신 그룹」,공장에 대형 화재가 자주 났다고 해서 「불그룹」,딸이 많았다고 해서 「사위그룹」으로도 불렸다.
또 양정모 전 회장(72)은 1주일중 절반은 서울에서,나머지는 부산에서 보내 마지막까지 부산을 근거로 삼았던 부산재벌이기도 했다.
국제는 양 회장이 그의 부친 양태진씨(76년 작고)와 함께 47년 부산 범일중 부친의 정미소 한켠에 고무신 공장을 차리면서 시작됐다.
부신 양씨는 신발회사 설립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부산공업학교를 나온 아들 정모씨가 『학교에서 배운 화학공업을 하면 돈벌 자신이 있다』고 우겨서 세운 회사였다.
첫불은 48년 부친의 정미소에서 일어났다. 양씨는 할수없이 아들의 의견을 쫓아 신발로 업종을 전환했고 49년에는 「국제고무 공업사」를 정식으로 설립,왕자표 신발을 내놓았다.
국제도 다른 그룹들과 마찬가지로 6·25 전쟁의 와중에서 도약의 전기를 잡았다.
공장이 최후방인 부산에 있었던 덕분에 군당국에 의해 군수품 제조공장으로 지정되어 전쟁중에도 쉴새없이 공장을 돌리고 엄청난 돈을 끌어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두번째 불은 60년에 일어났다.
공장에서 일하던 66명의 종업원이 숨지고 2억9천여만환의 재산피해를 냈다.
당시 국제의 자본금이 3천만환이었던 점에 미루어 타격은 엄청났지만 그전에 쌓아두었던 이익금으로 국제는 다시 일어설수 있었다.
63년에는 최첨단 시설을 갖춘 수출용 신발류와 비닐제품 메이커인 진양화학을 설립했고 「불난 자리에 장사가 잘된다」는 속설대로 국제의 성장은 눈부셨다.
70년대 초반 국제는 신발 수출붐을 타고 엄청난 이익을 남겼으며 72년 사채동결 조치도 한몫을 했다.
자본금 5억5천만원에 사채가 무려 4억3천만원에 이르렀던 국제는 어느 기업보다 큰 혜택을 누린 것이다.
이에 힘입어 71년 직물가공업체인 성창섬유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72년 국제상선 ▲73년 국진기업·국제방직 ▲74년 신동제지·동해투자금융을 신설하는 등 몸집 부풀리기에 들어갔다.
동서증권·국제제지·동우산업·풍국화학·조광무역·국제토건·국제종합엔지니어링·원풍산업 등도 잇따라 인수했다.
국제상사는 75년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됐고 77년 철강재벌인 연합철강계열 4개사(연합철강·연합물산·연합개발·연합통운)을 몽땅 인수함으로써 국제그룹은 절정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50년대말 당시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술자리에서 맺은 끈끈한 정도 한몫을 했다고 한다.
이에따라 국제는 국내 7위의 그룹으로 부상했지만 무리한 확장으로 부채는 늘어나고 수익성도 악화됐다.
11명의 딸을 가진 양 회장은 80년대 들어 사위를 대거 경영에 참가시켰고 양 회장의 다섯째 사위인 김덕영씨(현재 두양그룹회장)는 부회장에 발탁돼 2인자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80년대 초반부터 몰아닥친 경기 부진의 와중에서 양 회장은 용산의 국제사옥을 무리하게 짓고 부산에 골프장을 만들다 늘어나는 부채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무너지게 되었다.
『외상은 강도짓과 다름없다』며 평소 남의 돈 쓰기를 두려워했던 양 회장은 마지막에 몰리자 고이자인 완매채를 무리하게 끌어들였으며 당시 금융당국의 여신동결조치와 단자 여신규제방침,완매채 규제방침 등 잇따른 금융긴축정책은 부채비율이 높았던 국제의 몰락을 재촉했다.<이철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