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문화가 있는 사회로/안병영(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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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현대 노사분규가 파국직전에 수습되는가 하더니 아직도 재연의 불씨가 남아있다는 소식이고,이른바 한­약분쟁도 완전히 가라앉지 않고 있다. 그런가 하면 가닥이 잡힐 듯 하던 전교조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 갔다. 그나마 보궐선거 날짜를 둘러싼 여야간의 명분없는 격돌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지난시대를 풍미하던 체제논쟁은 거의 자취를 감춘 반면 민주화 바람과 함께 우리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집단이익이 폭발적으로 분출하여 왔고 이들 제이익간의 첨예한 갈등은 심각한 정치·사회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우리는 이 사회가 집단이익과 연관되는 다양한 갈등의 관리와 해결에 얼마나 미숙한가를 다시 한번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갈등해결 능력 제고는 우리 사회가 문민시대에 이루어야 할 주요한 과제다.
○집단이기 폭발적 분출
누구나 다 아는 얘기지만 오늘 이땅의 집단 이기주의는 과도하게 팽배해 있다. 대부분의 집단들은 공익,공동선과 같은 보다 큰 공동체의 이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눈앞의 협소한 집단 이익에만 집착하여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온갖 극한적인 방책을 다 동원한다.
이들은 집단 이기주의를 으레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하고,이 명분을 교조화하여 실용주의적 타협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익집단들이 취하는 전형적인 행태는 「벼랑에서의 힘겨루기」다. 당사자들은 상충하는 집단이익을 조정하고 타협하기 위한 적절한 단계를 차분히 거치지 않은채 단숨에 막판으로 치닫는다. 그들은 벼량끝까지 가서 마지막카드를 내 보이고 숨가쁜 힘겨루기를 시작한다.
한­약분쟁에서 한쪽은 면허반납을,다른 한쪽은 휴업을 앞세우며 파국을 불사한 일이나 보선날짜를 둘러싸고 여당은 혹서카드를,야당은 선거 불참 카드를 내 보이며 힘겨루기에 나선 것도 바로 이러한 모습이다. 따라서 집단 갈등은 언제나 극화된 양상을 연출한다. 쌍방 모두가 완승을 겨냥할 뿐 타협을 통해 공동승자가 되는 길은 택하지 않는다. 간혹 시계제로의 아스라한 벼량에서 쟁점이 극적으로 타결되는 일도 있지만 적지 않은 경우에 문제 해결을 위한 수단으로 공권력이 동원된다.
○갈등 곧바로 극한대결
집단 갈등을 타협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얼마간의 신뢰와 감정이입능력,상대방의 유인구조를 파악하고 이를 움직일 수 있는 슬기,그리고 협상단계 마다의 치밀한 손익계산 등이 두루 필요하다. 말하자면 협상을 통해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아내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처음부터 상대방을 적으로 규정하고 벼량 밑으로 밀쳐버릴 타도의 대상으로만 생각한다면 타협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의 많은 집단들은 자율적 갈등 해결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다 하겠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타협문화 부재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타협문화가 자리잡기 위해서는 참된 의미의 개인주의와 큰 공동체문화가 함께 개화될 필요가 있다. 우선 우리 사회에서는 자유롭게 사유하고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개인의 의미가 별로 부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많은 이들은 집단속에 매몰되어 마치 자동인형처럼 집단 이기주의가 지령하는대로 움직인다. 그러나 참된 개인주의의 세례를 받은 이라면 조직 내에서 민주적 의사소통 구조를 형성하는데 주체적으로 관여하며,공적인 토론을 통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바르게 정의하는데 익숙할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더욱 큰 공동체 문화까지 체득한다면 집단이익을 보다 장기적이고 공익지향적 맥락에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갈등 해결을 위한 제도적 메커니즘을 발전시키는 일이 매우 시급하다. 공식적 제도를 통해서든,아니면 비공식적 관행을 통해서든 갈등의 당사자들을 일정한 절차적 틀안에 엮어넣는 것이 필요하다. 서구 선진 산업국가들은 노사갈등을 비롯한 실로 다양한 산업사회의 이익갈등을 조정·중재하기 위해 치밀한 제도적 메커니즘을 발전시키고 있다. 흔히 많이 쓰이는 방법이 정부의 공식적 정책결정 과정에 이들 상충하는 이익집단을 두루 참여시키는 방법이다. 이와 더불어 정부 내에 주요 부서간 정책과 관련된 다양한 갈등을 조성하기 위한 기구나 심급을 마련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민주적 의사소통 절실
집단 갈등의 슬기로운 관리와 해결을 위해서는 우리 사회 내에 공익 지향의 시민사회 영역을 확장시키는 일 또한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최근 경제정의 및 환경 등 여러 사회영역에서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 시민단체들의 역할이 막중하며,바르고 매운 소리를 아끼지 않는 언론들의 비중 역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들의 상대적 활동 영역이 신장되고 공익 지향의 조직적 노력이 보다 효과적으로 펼쳐질수록 편협한 집단 이기주의에 집착하는 이익집단들의 목소리는 낮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땅에 타협문화를 정착시키는 일은 그것이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일이기 때문에 상당히 긴 시간을 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갈등 해결을 위한 게임 규칙과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우리 사회 내에 시민영역을 확장시키는 일은 바로 오늘부터라도 떨쳐 나서야 될 일이다.<연세대교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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