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좌추적은 법절차대로(사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요즘 우리나라에서 은행에 돈을 맡길 때는 적어도 비밀이 공개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것은 예금자가 갖는 가장 불안한 것 가운데 하나다. 어수선한 세상을 살아온 우리들에게 그처럼 기분 나쁜 일은 없다. 예금 비밀 보호를 제1의 서비스 수칙으로 삼고 있는 금융기관의 장마저도 사정바람에 계좌츨 추적당하는 일이 벌어졌던 것도 최근의 일이다. 법의 제정과 집행 및 수호를 다짐해왔던 전직장관들이나 검사장까지도 은행에 돈을 얼마나 넣어 두었는지를 철저히 조사당했다.
이들에 대한 예금추적이 법원의 압수수색 영장에 따라 집행되었느냐에 의문이 제기될 만큼 예금 비밀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이렇다면 하물며 보통 시민의 예금이 어떤 대우를 받을지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다.
공직자 재산등록 및 공개에 따른 재산실사를 위해 대상자 및 가족의 예금계좌 조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과 함께 적지 않은 뭉칫돈이 금융기관에서 빠져나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검찰은 법에 의하지 않은 사정기관의 계좌추적 조사가 있을 경우 관계자를 전원 의법조치하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 우리로선 매우 얼떨떨한 심정이다. 한편으로는 가슴이 답답해오고 화도 치민다. 「금융실명거래에 관한 법률」을 어겨가면서까지 자주 계좌를 뒤져온 당사자는 정부였다. 문민정부가 들어서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개혁과 사정바람으로 압수수색영장 없는 계좌 추적이 오히려 당연시되는 분위기였다. 이런 판국에 정부가 관계법을 위반하는 사정기관 관계자를 의법조치 하겠다는 것이 도대체 미덥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가 예금 비밀을 보호하지 않으면 큰일 나겠다고 생각해 만든 것이 바로 실명거래법이다. 그 법을 탄생시키기까지 우리 경제는 이­장어음이 사기사건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예금 비밀 보호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의 돈의 속성상 어느 나라에서나 강력히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스위스는 고객의 비밀을 보호하지 못한 금융인에게 형벌을 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실명법도 그런 조항을 갖추고는 있으나 고객들은 금융기관이나 정부를 믿지 않게 되어버렸다.
우리의 예금 비밀을 보호해줄 곳이 없다는 무력감 때문에 외국계 은행을 찾거나 개인금고에 현금을 묻어두는 일이 없도록 하려면 사정기관 스스로가 앞장서 법을 준수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도 돈의 속성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 자기와 친인척들이 명백한 혐의도 없이,그것도 법이 규정하는 영장 없는 누군가로부터 계좌를 조사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처럼 불쾌하고 불안한 일은 없다.
개혁은 있는 법을 지키는 것부터 시작돼야 한다. 앞으로 실명제가 성공적으로 실시되느냐의 여부는 지금부터 예금 비밀이 얼마만큼 잘 지켜지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