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파헤치기 이젠 좀 그만(성병욱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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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신정부 출범후 지난 5개월간 우리사회는 그야말로 격변의 소용돌이를 겪었다. 사정의 태풍 속에서 내로라하던 구시대의 수많은 인물들이 자리를 잃고 정치를 그만두었다. 또 수만은 인사가 줄줄이 쇠고랑을 차거나 도피성 출국을 했다.
○사정 홍역앓는 관·재계
수십년 곪은 사회의 환부를 파헤치는 이 작업은 국민의 열광적 지지와 관심 속에서 시작되었다. 초기 일부 여론조사에서는 90% 이상의 높은 지지마저 나타났다. 그러나 구체적 이득과 직결되지 않은,단순히 속 시원하다는 기분만으로 국민의 열광은 장기간 지속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아무리 각각의 내용은 다르다 해도 거듭된 사정의 대상이 과거사에서 맴돌면서 신선감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더구나 공무원들의 분위기가 경직돼 오히려 일하기가 더 불편하다는 느낌이 확산되면서 초기의 열광은 급속히 식어가는 느낌이다.
개혁과 사정은 원래 부패의 비용을 줄여 사업하고 일하기 좋도록 하자는 데 취지가 있을 것이다. 확실히 장기적으로는 그런 효과가 날 것이다. 그러나 중소기업을 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구동성으로 당장은 사업하기가 더 힘들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모든 법과 제도는 관료 편의로 되어 있어 담당 공무원의 재량의 폭이 넓다. 새 정부에서 행정규제를 획기적으로 줄이려고 하지만 법령 개폐가 필요한 것도 있고 관행도 있어 아직 규제완화는 실감한 정도가 못된다. 행정규제가 심해도 전에는 담당공무원과의 관계만 좋으면 재량권을 발휘해줘 일하기가 편했는데 지금은 몸 사리느라 결정을 기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상적으로 돌아가는 일에는 문제가 없지만 관공서의 결정을 필요로 하는 새로운 일을 벌이기는 무척 힘들어졌다는 얘기다.
아무리 정부 지도층에서는 진정으로 사정이 기업활동에 도움이 된다고 믿고 그것을 강조해도 실제로는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게 현실이다. 공무원들만 경직되는게 아니라 기업인들도 불안해하고 장래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 지난날의 총체적 부패구조 속에서 대소간에 사업하는 사람치고 뒷거래를 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개혁과 사정을 통해 앞으로 이런 구조를 고쳐 부패의 악순환을 끊으려는 것은 백번 옳은 일이다. 그를 위해 대표적인 과거비리를 드러내 일벌백계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과거 파헤치기가 너무 지나치면 지난 세월 어느정도 뒷돈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기업인들이 불안해지고 그렇게 되면 투자를 기피하게 된다.
○정치보복 악순환 우려
그렇다고 기업인에게 면책특권을 주자는 것 아니다. 파렴치할 정도로 이득에 집착한 사람이 처벌을 받는건 당연하다. 다만 과거의 부패구조 속에서 사업을 한 대부분의 기업인이 불안감을 갖도록 해서야 되겠느냐하는 얘기다. 그래서 개혁과 사정은 지속적으로 해나가되 속도를 조절하고 미래지향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현재 진행중인 과거사에 대한 사정작업이 어느정도 마무리되면 그 중심을 새 정부 출범 이후의 일로 옮기는 가시적 조치가 필요하다. 잘못된 과거는 청산해야 하나 과거 그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 거기에서 오늘을 경계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교훈을 얻으면 되는 것이다. 과거에 너무 집착해 오늘의 활력을 떨어뜨리는 것은 현명치 못하다. 지금까지가 과거 파헤치기 강조기간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미래설계 강조기간이 되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현재 여야간에 논의되고 있는 12·12,율곡사업,평화의 댐에 대한 국정조사문제도 좀더 깊이 생각해 볼 측면이 있다.
12·12는 법적 관점에서 보면 분명히 위법적인 군내부 반란이다. 그것는 5·17로 이어지는 성공한 쿠데타의 시작이었다. 그것을 기초로 5공화국이 태어났고,결국 6공과 문민정부로 이어졌다.
그 때의 진상중 밝혀지지 않은 부분을 밝혀내고 책임소재를 가리는 건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기초로 하여 이미 쌓여진 10여년의 역사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지금와서 새삼 법적 책임을 묻는다면 우리 정치는 보복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미래지향 아쉬운 개혁
율곡사업과 평화의 댐에 대해서는 감사원의 감사가 행해졌거나 진행되고 있고,특히 율곡사업 비리에 대해서는 사법조치가 진행중이다. 국회의 조사기능이나 「계속중인 재판 또는 수사중인 사건의 소추에 간여할 목적으로 행사되어서는 아니된다」는 국정감사 및 조사에 관한 법률(8조)의 정신에 비추어 이 문제에 대한 국정조사의 효용에는 한계가 있다.
더구나 세가지 과거사에 대한 국정조사가 텔레비전 중계라도 되면 6공초의 청문회처럼 우리 사회는 또 한차례 과거 파헤치기 홍역을 앓게될 것이다. 과거사를 덮어둘 수만은 없지만 그것은 이제 학계·언론계 등 사회 각계의 연구와 논쟁에 맡겨도 된다. 이 중요한 시기의 정치는 이제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의 일에 더 정력과 관심을 쏟아야 하지 않겠는가.<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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