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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구가 안 보인다|러시아 경제개혁-고질 인플레 정치력 빈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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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지난 7일부터 사흘동안 일본 동경에서 열린 서방선진7개국(G7)정상회담은 러시아경제의 민영화를 지원하기 위해 30억 달러를 원조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러시아 경제개혁에 대한 서방의 이 같은 원조는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러시아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러시아의 경제개혁은 아직도 캄캄한 터널 속에 있다. 보리스 옐친대통령이 집권한지 1년 반이 넘었으나 이 나라 경제상황은 좀처럼 호전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루블화가치 폭락·실업증가 등은 옐친의 경제개혁에 한 가닥 기대를 가졌던 러시아 국민들의 불만을 증대시키고 있으며, 치안부재에 따른 범죄만연·국민보건의 악화·생활고 가중 등으로 사회적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의 심각성은 개혁작업을 주도적으로 이끌만한 정치력이 제대로 확립되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 더욱 커진다.
옐친대통령은 지난 4월 국민투표를 통해 자신의 개혁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는 일단 성공했으나, 계속되는 경제혼란을 빌미로 정치 공세를 필치고 있는 보수파의 강한 저항을 받고 있다.

<보수파저항 거세>
옐친대통령은 지난 6월초 제헌회의를 소집,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력을 인정하는 새헌법을 통과시킴으로써 개혁정책을 밀어붙이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려 했으나 이같은 복안도 보수파의 강력한 반발로 교착상태다.
러시아는 경제회생의 돌파구를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의 원조에서 찾으려 하고 있으나, 국제통화기금(IMF)등은 금융지원의 전제조건으로 통화안정·재정적자 축소 등 러시아로서는 단시일 내에 이루기 힘든 요구사항들을 내세우고 있다.
러시아경제의 불안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루블화가치 폭락이다.
지난해 5월 1백20선을 맴돌던 미달러화에 대한 루블화의 환율은 하락을 거듭, 올해 1월 들어 5백선을 넘어서더니 지난 5월20일에는 달러당 1천루블을 돌파하면서 러시아 경제의 통화체계를 뒤흔들어 놓고 있다.
현재 1천1백선을 넘보고 있은 루블화의 대달러환율은 앞으로도 더 떨어질 것으로 예상돼, 통제불능의 인플레이션과 맞물려 러시아 경제를 벼랑끝까지 몰고 갈 위험성이 커지고 있다.

<불당 1천1백선>
인플레이션은 러시아 경제의 정상화를 가로막고 있는 고질적 장애물이다.
지난해 가격자유화 조치와 함께 연 2천6백%의 폭발적 상승세를 보였던 소비자물가는 올해 들어서도 월20∼30%의 높은 오름세를 유지하다 5월에 19%로 낮아지긴 했지만 초인플레(월인플레율 50%이상)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인플레이션의 근본원인은 정부가 막대한 재정적자를 무릅쓰고 부실 경제부문에 대한 각종 보조금 지급을 계속하는 데다 중앙은행도 적자양산 국영기업에 싼 이자로 대출을 해주는데 있다.
국제경제전문가들에 따르면 러시아 정부는 지난해 14조 루블의 국내총생산(GDP)가운데 20%이상을 국영기업체 등에 대한 보조금으로 사용했다.
직접적 예산보조금 외에 중앙은행을 통해 이루어진 값싼 이자의 여신 등을 포함하면 러시아의 국가보조금은 GDP의 3분의 1에 이르며, 이는 제3세계 국가들의 정부보조금보다 더 큰 규모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보조금 지급으로 러시아 정부는 지난해 국민총생산(GNP)의 20%에 이르는 재정적자를 보았다.
이 같은 전반적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개혁·보수파간 대립은 난국 타개를 위한 일관된 정책 마련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보리스 표도로프재무장관을 비롯한 개혁파는 긴축예산·엄격한 여신통제·국가보조금 삭감 등 강력한 정책 추진을 통해 통화안정을 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빅토르 게라시첸코 중앙은행장 등 보수파는 이에 반대하고 있다. 보수파들은 국가보조금이 감축될 경우 자율경영 능력이 없는 다수의 국영기업체들이 도산할 것이며, 이는 곧 대량 실업으로 이어져 엄청난 사회혼란을 야기시킬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인플레억제 난망>
팽팽한 의견 대립을 보여오던 정부와 중앙은행은 지난 5월말 올해 말까지 월 인플레율을 10% 이내로 줄이고 통화증가를 분기별로 제한할 것을 골자로 하는, 공동정책에 합의,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번 조치가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의 지원을 얻어내기 위한 대외공약일 뿐 실현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 19%나 줄어든 뒤 올해에도 계속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는 산업생산량도 러시아 경제의 전망을 어둡게 하는 한 요소가 되고 있다.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총리는 최근 한 연설에서 『생산량이 증가하지 않으면 경제개혁은 이루어질 수 없다. 시장을 상품으로 채우지 않으면 어떤 강력한 통화·금융정책도 인플레이선을 멈추게 할 수 없다』며 생산증대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산업생산량이 늘어나기는 당분간 힘들 것이며 현재의 추세라면 올해 농·공업·건설부문 생산량은 각각 15%·4%·38%, 전체 산업생산량은 16%정도 줄어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난맥상을 보이고 있는 러시아의 경제상황이 개선되기는 당분간 힘들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의 위기상황이 곧바로 러시아 경제 파탄으로 이어지리라고 추론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사유화 계획의 순조로운 진행, 공식통계에 잡치지 않는 사적 경제부문의 성장, 자본주의적 의식의 확산 등은 구소련으로부터 물려받은 계획경제체제를 자유시장경제체제로 대체하는 러시아의 노력에 청신호가 되고 있다.
지난해 3만3천개의 소규모 국영기업이 개인 손에 넘어갔으며 국민들에게 주식 구매권이 배부된 이후 중·대규모 기업에 대한 사유화도 본격화돼 올해 5월말까지 모두 7만여개의 국영기업들이 민영화됐다. <유철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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