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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사부장관-국민건강·복지 총대 멘 「가시방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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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보건사회부장관은 말 그대로 보건과 사회에 관한 국가정책을 이끄는 자리다. 그의 임무는 국민건강과 사회복지라는 양대 기능을 통해 개인과 사회를 건강하고 풍족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같은 보건기능과 사회기능이 한 장관의 관장사항으로 통합된 것은 55년. 정부수립 때는 사회부와 보건부가각각 독립된 정부부처로 설치돼 출발했다. 6·25전쟁 후 궁핍과 질병에 시달리는 국민들을 구제하는 일로 시작된 보사행정은 40년이 지난 지금 의료보험과 국민연금등 사회보장제도의 실시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형식적인 토대가 마련됐을 뿐 내용 면에서는 아직도 전반적으로 미흡한 실정이다.
국민생활의 질을 결정하는 보사행정은 한 나라의 정치·경제·사회적 수준을 총체적으로 반영하게 마련이다. 권위주의적 통치체제와 성장위주의 경제논리가 지배해온 우리의 과거로 볼 때 보사행정이 더딘 걸음을 해온 것은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당연한 결과라는 지적이다.
이 때문에 보사부장관의 위상 또한 복지국가의 건설이라는 정부의 오랜 구호와는 동떨어지게 낮게 자리 매김될 수밖에 없었다.

<행정부순위 13위>
정부조직법상 보사부장관의 서열은 경제기획원과 통일원을 포함한 16개 행정부가운데 13위.
또 지금까지 통치권자가보사부장관을 임명하는데 있어 보사행정의 효율적인 입안과 실행이라는 기준보다는 정치적 배려가 먼저 고려돼왔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55년 초대장관으로 의사인 최재유씨가 임명되는 등 초기의 몇몇 의료인들을 제외하고는 3공이후 지금까지 보사부장관자리는 대부분 지역이나 군·여성·통치권자의 측근 인사 등을 위한 정치적인 배려의 대상이 돼왔다.
개각때 보사부출신 관료가 장관물망에 올랐던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5공때 보사부장관 자리는 진의종·천명기·김정례씨 등 3공 시절 막강한 야권인사였던 3명에게 잇따라 돌아갔으며 지금까지 김정례·박양실·송정숙 장관 등 일반부처로서는 가장 많은 여성장관이 임명됐다.
보사부장관은 「빛 안나고 어려운 자리」라고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가시방석」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보사부장관 자리가 다른 어느 장관보다도 어려운 것은 업무가 방대한데다 보사행정이 국민생활은 불론 수많은 관련단체들의 각각 다른 이해와 민감하게 연결돼있기 때문이다.
보건분야만 하더라도 전염병유입을 막기 위해 외국에서 도착한 여객기의 화장실을 정밀검사하는 일에서부터 에이즈예방, 수입식품의 안전성 검사에 이르기까지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사회분야 또한 예식장의 화환수와 묘지의 면적을 결정하고 국민연금제도를 마련하는 등 굵직한 일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또 보사부와 직·간접으로 관련된 단체가 1천7백여개나 된다고 한다.
보사행정은 따라서 즉각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며 항상 여론의 초점이 된다.
74년 고재필 장관 시절 3년간의 연구끝에 제정된 국민연금법은 정부가 중점적으로 추진하던 중화학공업육성에 필요한 재원을 국민들로부터 거둬들이기 위한 것이라는 여론의 거센 반발에 부닥쳐 결국 긴급조치법에 의해 시행이 유보됐다.
언론에는 보사부장관이 쥐이빨을 드러낸 채 부대를 걸머지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등장하는 등 호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88년 시행에 들어간 국민연금의 기금은 현재 절반 가량이 공공투자재원으로 사용되고 있어 당시의 비판을 무색케 하고 있다.
벌써 수년째 논란만 거듭하고 있는 생수시판문제도 그렇다. 시판의 필요성은 충분치 제기하면서도 사회적 위화감을 우려하는 만만찮은 반대 때문에 역대 장관들이 선뜻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보건소 처음 설치>
역대장관의 굵직한 업적을 살펴봐도 정부와 국민, 이익단체들과의 치열한 투쟁(?)과정 없이 이루어진 것은 별로 없다.
60년대에 9대와 12대등 두 차례에 걸쳐 6년 동안 최장수 보사부장관을 지낸 정희섭씨는 보사행정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의 상황은 너나 할 것 없이 먹고살기 어려운 때라 보사행정은 빈민구제에 집중돼 있었다.
평양의전 출신으로 육군의무감을 지내다 5·16후 발탁된 정 장관도 미국으로부터 구호양곡을 얻어다 나누어주는 일이 주요과제였다.
의사로서 북유럽식 사회의료체제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재직당시 보건소법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공공의료혜택을 확대할 수 있도록 보건소를 설치하고 빈민들의 생활보호를 위해 생활보호법·사회복지사업법·아동복리법 등을 제정하는 등 사회보장장치 마련에 힘을 쏟았다.
당시 정 장관은 공공의료서비스의 확대에 항의하는 의사들로부터 눈을 오려낸 자신의 사진을 받는 등 거센 반발을 받았으나 굴하지 않고 추진했다고 한다.
또 현행 의료제도의 가장 큰 뼈대인 의료보험을 77년 도입한 16대 신현확 장관은이 제도의 성공적인 시행을 위해서는 수입이 안정적인 직장인들을 상대로 우선 실시하되 「가진 자의 사회보장」이라는 빈민층의 반발을 우선 막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 개년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의 의료비를 국가에서 부담하는 의료보호제도를 먼저 추진했다.
신 장관은 재정형편 등을 이유로 완강하게 버티던 박정희 대통령을 끈질기게 설득, 90억원의 의료보호예산을 확보하는데 성공했고 의료보험도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61년 시작 당시 3%였던 인구성장률을 90년에는 0.98%로 끌어내려 보사부의대표적인 성공사업으로 평가되고 있는 가족계획사업도제자리를 잡기까지는 웃지 못할 많은 일화를 남겼다.
68년 정희섭 장관이 2대째 장관으로 있을때 자신이 폐결핵환자인지 모르고 있던 40대 남자가 정관수술을 고결핵성염증이 나타나자 성불구가 됐다며 항의하는 바람에 수술을 권유했던 가족계획요원이 몇 달 동안 그집 가사를 돌봐주는 곤욕을 치러야했고, 산골마을에서 부녀자들을 상대로 여성생식기가 그려진 차트를 펴놓고 성교육을 시키던 가족계획요원이 이 광경을 보고 흥분한 동네청년들에게 혼쭐이 나기도 했다.

<부녀자에 성교육>
사회적 반향을 크게 불러일으키게 마련인 보사행정의 특성 때문에 장관이 재임기간 중 고통을 겪거나 퇴진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89년 문대준 장관은 여소야대 국회가 의결한 의보통합법안에 찬성입장을 표시했다가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바람에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문 장관은 당시 의보통합을 실시할 경우 관련단체의 반발등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지적이 보사부 내에 있었으나 국회에서 여당까지 합세해 법안을 추진하자 대세에 밀렸다가 3공 이후 7개월이라는 최단명 장관으로 기록되고 맡았다.
82년5월부터 3년 가까이 장관자리에 있으면서 한방의료보험을 도입하기도 했던 김정례 장관은 의약분업을 추진하기 위해 목포에서 시범실시를 하는 과정에서 의사들이 처방전을 내주지 않는 바람에 반발한 약사들이 사흘동안 문을 닫는 의약사상초유의 파업사태를 겪어야했다.
또 김종인 장관은 라면우지파동으로 곤욕을 치렀으며 안필준 장관은 징코민사건으로 부하직원에 대한 조사를 검찰에 의뢰하는 진통을 겪어야 했다. <이덕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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