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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피치] (139) '그라운드의 빠삐용' 이상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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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LG)을 만나면 두번 놀란다. 처음에는 도전적인 시선에 놀란다. 그는 상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한다. 피하는 법이 없다. 노려보는 것 같기도 하고 대드는 것 같기도 하다. 어깨까지 치렁치렁한 갈기머리의 이상훈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얘기할 때 웬만한 사람은 '흠칫'하고 뒤로 물러서게 된다.

둘째는 목소리다. 글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미성(美聲)을 지녔다. 거친 외모와는 전혀 딴판이다. 그래서 놀란다. 그 목소리에는 눈물이 묻어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어려서부터 가슴 한편에 담아온 설움이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상훈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서울 신림동 단칸방을 전전하며 눈물 젖은 빵을 먹었다. 야구는 이상훈에게 세상을 향한 설움의 분출구였다.

이상훈의 LG 입단과 해외진출(일본 주니치 드래건스)을 성사시킨 최종준 전 LG 단장(현 SK 와이번스 단장)은 '최단장의 LG야구 이야기'라는 책에서 이상훈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상훈은 지기를 죽기보다 싫어하고, 의리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긴다. 반면 사고와 행동은 매우 단순하고, 그것을 곧바로 표현한다. 좋은 것과 싫은 것이 분명한 성격이다"라고.

최단장은 지독한 가난과 싸우면서 성장한 이상훈이 수퍼스타가 되면서 몇가지 성향이 생겨났다고 보았다. 그 성향 가운데 하나로 조직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꽉 짜인 규범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성격을 들었다. 그리고 이상훈이 현실사회를 철저히 부정하며 강한 영웅심리를 지니게 됐다고 적었다.

그래서 이상훈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별명은 '야생마'나 '삼손'이 아니라 '빠삐용'인 것 같다. 그가 고려대 재학시절 야구를 그만두겠다며 무려 열네번이나 숙소를 이탈해 도망쳤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화다. 이상훈은 그때마다 두말없이 자신을 다독거려 주고 다시 야구공을 손에 쥐어준 고(故) 최남수 전 고려대 감독을 가장 존경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 이상훈은 "내 머리를 자를 수 있는 사람은 돌아가신 최감독님뿐"이라는 말로 세상에 대한 반항과 고인에 대한 존경심을 동시에 표현하곤 한다.

1997년 말 LG를 떠나 주니치로 갈 때도 그랬고, 일본에서 2년 만에 성공한 뒤 팀이 리그 우승의 축배를 들던 날 느닷없이 미국 진출을 선언할 때도 그랬다. 이상훈은 끝없이 자신이 속한 틀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2002년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다시 한국으로,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준 LG로 돌아올 때도 그랬다. 이상훈은 자신만의 완전한 자유를 갈망하고 세상의 속박에서 뛰쳐나오고 싶어했다. 영화 빠삐용 속의 스티브 매퀸이 그랬던 것처럼.

이상훈은 그래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지도 모른다. 그는 노래를 세상을 향한 자유의 외침이라고 여긴다. 이순철 신임 감독과의 갈등도 이상훈으로서는 자유를 찾아가는 하나의 과정일 것이다. 이상훈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노래로 빠삐용의 주제가 '바람처럼 자유롭게(Free as the wind)'가 생각난다.

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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