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박노해『참된 시작』|계급적 자각·서정성 등 시적 변모 담아|최두석<문학평론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참된 시작』은 일찍이 노동시의 진수를 보여준 바 있는 박노해씨의 두 번째 시집이다. 노동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의 생활과 감정이 절절히 배어 있는 첫 시집『노동의 새벽』은 노동자 계급의 사회적 진출을 예시한 기념비적 시집으로 이미 정평이 나 있거니와 최근 간행된『참된 시작』은 첫 시집 이후의 시적 변모를 보여준다.
『참된 시작』에서 주목되는 첫 번째 경향은「머리띠를 묶으며」「못생긴 덕분에」「공장의 북」「허재비」「씨방이 타령」등의 선동성과 서사 성을 동시에 지닌 시편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시적 주체를 전위활동가로 설정한 이러한 시들에서는 노동해방 투쟁을 선도하려는 강한 목적의식이 표면화되어 드러난다. 하지만 박노해의 시인으로서의 재능은 우격다짐으로 구호만 외치지 않고 적절하게 시적 상황을 부여해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데 있다. 즉 선동성과 서사성의 균형감각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유지되느냐가 이러한 시편들의 성패를 좌우하는 듯한데 위에 거론한 시들은 비교적 성공적인 경우라 판단되며 선전선 동시로서나 이야기 시로서 유념할만한 양식적 실험으로 보인다.
『참된 시작』에서 주목되는 두 번째 경향은「이 땅에 살기 위하여」「우리의 몸」「아픔의 뿌리」「조업재개」등의 노동자로서의 계급적 자각을 다룬 시편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시집『노동의 새벽』의 세계와 가장 근접한 이러한 시들에서 구호 차원의 선전 선동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전위 활동가라기보다 노동자의 한 사람으로서의 시적 주체가 계급적 각성을 하는 상황·과정이 형상화되었기에 노동자의 생활과 감정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어차피 계급적 각성이란 선승의 득도처럼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삶의 국면마다 섬세하게 이루어지는 게 아닌가 생각되며 노동자의 생활 감정을 핍 진하게 형상화하는 것이야말로 노동시의 본령인 듯하다.
『참된 시작』에서 주목되는 세 번째 경향은「경주 남산 자락에 나를 묻은 건」「그해 겨울나무」「모과 향기」「강철 새잎」「상처의 문」등 구금 및 투옥 이후의 심경이 반영된, 서정적 울림의 파장이 큰 최근의 시편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시들에서 시적 주체는 패배의 상처를 추스르고 일어서려 고투하는 옥중의 무기수 박노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는 힘들여 마음 밭 갈아엎어 사랑의 싹이 움트길 기원하거나 스스로를 언 땅에 발가벗은 채 서 있는 겨울나무에 비유해 연두 빛 새 이파리를 피울 것을 기다리기도 하는데 그 싹과 잎은『강하고 깃발 날리는 것보다 부드럽고 나직한 것이 더 힘차다는 것』을 알아낸 자의 강철 새 잎이다. 이처럼『참된 시작』은 노동해방 투쟁을 앞장서서 이끄는 선전 선동 시로부터 자신의 행적을 되돌아보고 상처를 아프게 응시하는 옥중 시에 이르기까지 가파른 변모의 궤적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80년대에서 90년대로 이어지는 격동기를 뜨거운 열정으로 살아 낸 시인의 삶의 역정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시 쓰는 행위의 엄중함을 새삼 깨우치게 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