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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표번호로「돈 꼬리」잡는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추적 방법>
예금(자금)의 추적조사는 드러내기 곤란한 검은 돈이나 범죄성 자금의 흐름을 통해 공범(관련자)을 밝혀 내고 증거를 확보할 때 쓰는 방법이다. 자금추적의 원리는 어찌 보면 간단하다. 돈이 건네 지면서 사용된 수표번호를 추적하거나 돈이 옮겨다닌 예금계좌를 훑어 가면서 관련자와 거래된 액수를 들춰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갑이란 사람이 누구에게『잘 봐 달라』며 뇌물을 주었다면 갑의 계좌에서 나온 수표의 번호를 추적하면 된다. 이같이 돈의 종착역을 찾아내는 방법은 자금추적 전문가들 사이에「정 추적」이라 불린다.
거꾸로 을이란 사람이 여러 가지 이권에 개입하고 청탁을 받아 처리해 주는 등 상당히 문제가 있는 경우 돈을 받았을 을로부터 출발해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돈의 원천이 어디인지를 밝혀 내는 방법도 있다. 이는 「역추적」으로 불린다.
얼핏보면 간단한 것 같지만 추적 대상자도 그리 쉽사리 노출되도록 돈을 굴리지는 않는다. 여러 가지 복잡한 방법으로 이른바 「돈 세탁」을 하기 때문에 내노라 하는 자금추적전문가들도 애를 먹는 경우가 많다.
추적대상자의 예금계좌를 확보했거나 증인이 있을 경우 자금추적은 쉽다. 지난해 말 현대중공업 비자금사건 때는 자금출납을 맡았던 정윤옥씨의 폭로와 입출금 메모가, 있어 돈이 어디로 흘러들어 갔는지 쉽게 가릴 수 있었다. 입시부정 사건도 브로커를 잡아 그의 예금통장을 확보했으며, 군 진급비리 사건도 특정계좌에 돈을 넣어 주었다는 진급대상자 부인의 진술이 있어 작업이 쉬웠다고 은행감독원의 자금추적전담검사6국 관계자들은 전한다.
그러나 슬롯머신 대부 정덕진씨의 경우와 같이 2백여 개 가명계좌를 갖고 돈을 움직인 데 다 예금계좌를 거치지 않고 슬롯머신 업소에서 거둬들인 헌 수표를 가방에 넣어 직접 건네주면 추적하기 어려워진다.
이같은 경우 추적 반은 우선 추적대상 인물의 실명계좌부터 본다. 병이 문제의 인물이라면 병의 주민등록번호를 금융전산망에 넣어 그 이름으로 개설돼 있는 모든 계좌를 찾아내 입출금 거래내용을 샅샅이 훑는다.
특히 뇌물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는 기간의 입출금 내용을 정밀 조사한다. 거액이 현금으로 들어왔거나 액수가 백만원단위로 딱 끊어지는 뭉칫돈이 입금됐다면 일단 의심을 두고 이를 거꾸로 추적해 보내 준 사람을 찾아낸다.
여기서 검은 돈을 밝혀 내지 못하면 병의 실명계좌로부터 빠져나가거나 들어온 돈의 흐름을 정 추적한다. 수십 개, 수백 개로 갈라지는 자금이동상황을 뒤쫓다 보면 병의 숨겨진 가명계좌와 만나는 경우가 있다. 이때 병이 세탁하면서 부주의로 빠뜨린 10만원 짜리 수표 한 장이라도 가명계좌로 입금시켰다면 병의 가명계좌가 줄줄이 드러나게 된다.
이래도 밝혀 내지 못하면 병의 집이나 사무실에서 가까운 은행지점을 골라 뇌물거래가 있었을 만한 기간의 거래전표를 뒤진다. 한 지점의 하루 거래전표가 수천 장이라 실로 엄청난 작업이다. 그러나 돈 세탁에 이용된 계좌는 아무래도 특징이 있어 가려낼 수 있다.
이를테면 기억하기 쉽게「홍길동」「○○일」「○○이」「○○삼」식의 이름, 비밀번호도 「1234」「1111」등으로 쓰며 대개 통장을 만든 지 며칠 안에 집중적으로 몇 번 쓰고서는 입출금이 끊긴다. 인감도장은 1회용 목도장을 많이 쓰며 예금주 이름과 도장에 새겨진 이름이 다른 경우도 있다. 주민등록번호는 쓰지 않으며 쉽게 돈을 넣고 빼 갈 수 있는 보통예금이 많다. 이런 계좌를 요주의 계좌로 지목한 뒤 정밀조사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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