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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가된 봉산산방…未堂 체취 되살아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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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지난 9일 시인 민영(70).문정희(57)씨가 서울 관악구 남현동의 2층 양옥집 '봉산산방(蓬蒜山房)'을 찾았다. 미당 서정주(1915~2000)시인이 70년부터 30년 동안 거주하며 창작의 산실로 삼았던 곳이다. 건축업자에게 팔려 철거될 위기에 놓였던 봉산산방은 지난해 말 서울시가 다시 사들인 덕분에 간신히 살아남게 됐다.

앞다퉈 들어서고 있는 4~5층짜리 다세대주택들에 둘러싸여 섬처럼 고립된 봉산산방은 폐가나 다름없었다. 미당이 세상을 뜬 뒤에도 한동안 집을 지켰다는 잡종개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문 손잡이를 칭칭 동여맸던 쇠사슬을 구청 직원이 풀어주자 헝클어진 머리처럼 어지러운 정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1층 현관으로 이어지는 통로마저 잡초에 묻힐 지경이었다. 미당이 공들여 가꿨다는 은행나무.감나무.앵두나무.백일홍.목련이 말라죽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건물 내부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1층 마루의 라디에이터를 덮었던 목재 덮개는 떨어져 나와 마루 한복판을 뒹굴고 있었고, 누구의 필적인지 모를 메모지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미당이 말년에 서재로 사용하며 거문고를 배우기도 했다는 1층 방 한구석에는 누렇게 색바랜 문예지들이 흩어져 있었다. 옆에는 썩은 이불 몇 채가 버려져 있었다. 2층 마루는 깨진 유리투성이였다. 구청 직원은 "2층 베란다로 통하는 바깥 유리창문의 새시만 누군가 떼어가고 유리는 깨버린 것 같다"고 말했다. 미당의 두 아들은 미국에 살고 있다.

민씨와 문씨는 수습되지 않고 버려져 있는 미당의 흔적이 밴 물건들을 발견할 때마다 안타까워했다. 문씨가 1층 미당 선생의 부인 방옥숙(2000년 작고)여사의 방에서 왼쪽 알이 빠진 굵은 뿔테 안경을 발견하자 민씨는 "선생 물건이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2층 서재에서는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영문판 릴케의 시집이 발견됐고, 선물받은 것으로 보이는 미당이 소를 탄 작은 그림 한점이 발견됐다. 문씨는 같은 방 복판에 널려 있는 방여사의 화장품 10여개 중 한개의 뚜껑을 열어보고는 "사모님의 것이 분명한 손가락 자국이 화장품 내용물 표면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문씨는 "화장실에 널려 있는 컵들과 슬리퍼도 예전에 선생이 사용하시던 것들"이라고 말했다.

황급히 떠난 흔적이 역력한 피란민의 집처럼 황량한 봉산산방의 모습에 두 사람은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97, 98년께 이후 처음으로 봉산산방을 찾았다"는 민씨는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우리의 정신적 자산인 한 문학가의 체취가 밴 집을 이렇게 대접해 놓고 과연 우리의 21세기가 문화의 시대라고 얘기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민씨는 또 "미당의 정치적 행보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부정하거나 미당의 잘못된 행동을 변호하려는 게 아니다. 물론 잘못은 저질렀다. 그러나 미당이 한국 문학에 끼친 공적은 그의 정치적 잘못보다 더 큰 것이다. 그의 흔적을 없애는 게 능사는 아니다"고 말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시분과위원장을 맡고 있는 민씨는 70년대 중반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에 발을 들인 이후 미당과는 정치적 입장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왔다. 그러나 미당을 통해 문단에 등단한 미당의 제자라는 점에서는 문씨와 다르지 않다. 그는 "일제시대 미당은 문단의 중심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또 미당 말고도 친일한 문인은 많다. 미당 혼자서 그 짐을 다 짊어질 이유가 없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서울시는 미당이 세상을 뜬 직후인 2001년 1월 봉산산방을 미당기념관으로 활용하려다가 미당의 친일행적 등을 앞세운 반대 여론에 밀려 포기했었다. 최근 들어 육당 최남선, 빙허 현진건 등의 고택이 헐린 뒤 안타까워하는 여론이 빗발치자 '옛 문인의 생가 등 문화사적 가치가 높은 집들은 보존하겠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문학계의 의견을 수렴해 봉산산방의 처리를 결정하겠다고 밝히고 있을 뿐 구체적인 활용방안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있다. 서울시의 조심스러움은 문학적 성취와 정치적 행보가 일치하지 않았던 미당의 삶과 문학에 대한 평가가 여전히 엇갈리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어쨌든 봉산산방은 커다란 족적을 남긴 문인의 빛과 그림자를 남은 이들이 어떻게 처우하는지에 대한 척도가 될 것이다. 봉산산방 앞에는 쑥[蓬]과 마늘[蒜]에 버금가는 괴로운 시간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신준봉 기자<inform@joongang.co.kr>
사진=조용철 기자 <youngc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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