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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보이스피싱에 걸려들다

중앙일보

입력

휴가 마지막 날이었던 2일 아직 잠이 덜 깬 오전 8시30분,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서울검찰청 긴급 음성사서함입니다’라는 콜센터 기계음이 들려왔다. 이유 없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어지는 메시지. ‘지난 7월30일 1차 출두 요청에 응하지 않아, 2차 요청을 합니다.’

우선 집으로 출두 요청서가 배달되지 않았다는 생각부터 떠올랐다. ‘아냐, 내가 무심코 우편물을 버렸을지 몰라.’ 이런 생각이 들자 검찰청에 출두해야 할 일에 대해 온갖 억측이 다 떠올랐다. 우선 과태료를 안 낸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정도 일로 검찰청에 출두할 리는 만무했다. 마음 한 편으로는 그럴 일은 없다고 부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내 세상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어디 있나하는 생각이 압도해버렸다. 잠시 동안 눈앞이 캄캄해졌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메시지 후반부는 서울검찰청 어디로, 며칠까지 출두하라는 얘기인 것 같았다. 그런데 도통 장소와 시간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우리말이 서툰 여성이 마치 웅얼거리듯 녹음한 것 같았다. 다행히 말미에 ‘메시지를 다시 들으시려면 1번, 안내를 원하시면 9번을 누르십시오’라는 메시지가 덧붙어 있었다. 1번을 눌렀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 다시 들어도 장소와 시간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9번을 눌렀다. 약간은 어눌한 여성이 전화를 받았다.

“(웅얼웅얼) 안내 센터입니다.”
“네? 어디시라구요?”
“(버럭 소리를 지르며)안내 센터라니까요.”
“(기가 죽어서) 제가 출두 요청 전화를 받았는데, 어떻게 하면 확인할 수 있죠?”
“잠깐 기다리세요...(1분여를 기다린 후) 뚜 뚜우...”

잠깐 사기 전화가 아닐까 의심했던 마음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전화를 받은 여성이 저렇게 고압적인 걸 보면 왠지 검찰청이 맞을 것 같았다. 어떻게 2차 출두 요청을 확인할지 걱정이 앞섰다. 이번에도 나가지 않으면 뭔가 신상에 크게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발신자 추적 서비스도 도움이 안 됐다. 082로 시작되는 번호가 액정화면에 떠 있었지만, 전화가 걸리지 않았다.

때마침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전과 똑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다만 이번에는 안내센터의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전보다는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또 전화가 끊겨 버렸다. 다시 듣기를 다섯 번, 안내 요청을 두 번이나 했지만 출두 장소와 시간에 대해 알아낸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다.

이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직접 서울검찰청에 전화해 알아내는 수밖에는 없었다. 전화번호를 찾기 위해 한 지식 검색 포털사이트에 서울검찰청을 쳤다. 그 순간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컴퓨터 화면 맨 위에 ‘서울검찰청 사기 전화’에 관한 질문이 숱하게 올라와 있어서였다. 수법은 어느 경우나 똑같았다. 최신 기사에는 이 사기 전화 요금으로 70만원을 날리고 자살한 노인에 관한 기사와 제주 지역 시민들이 검찰청 사기 전화로 고통 받고 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KT에 전화를 걸어 오늘 이 보이스피싱 사기 전화로 인한 요금을 물었지만, 확인할 수 없었다. 사기당한 액수를 확인하려면 월말까지 기다려야 한다. 한 달여를 내가 얼마나 바보였는지를 자책하며 지내야 한다. 처음에는 죽이고 싶을 정도로 사기 전화 조직원이 미웠지만, 다음은 죽고 싶을 정도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냉철하기만 했다면 보이스피싱 사기 전화의 허점을 눈치 챌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선 서울검찰청 안내 전화의 발신자가 국제 전화번호인 점에 의문을 품었어야 한다. 적어도 기자라면 서울검찰청의 지청이 아니라 본청으로 출두하라는 요청을 이상하게 여겼어야 한다. 그러나 검찰청 출두 요청 앞에서 냉정함을 유지하기는 힘들었다. 보이스피싱 전화 사기단은 바로 이 점을 노렸을 것이다. 경찰은 이 사기 조직이 주로 대만에서 우리말을 할 줄 아는 중국 교포들을 고용해 전화를 걸어온다고 밝혔다. 그러니까 1번이나 9번을 누르라는 안내는 사실상 수신자 부담 국제전화나 유료 통화를 허용한다는 의미의 버튼이었을 것이다. 외국에서 전화를 걸어오는 만큼 이들을 막을 방법이 사실상 없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 표시창에는 ‘082’로 시작하는 예의 그 번호가 떴다. 전화를 받고 안내센터의 직원들에게 고함을 쳐주고 싶었다. 그러나 참기로 했다. 국제전화료가 얼마나 더 들지 모르는데다가 어차피 그들도 고용인에 불과했다. 안내에 따라 순순히 전화버튼을 눌렀던 내게 사냥감을 발견한 하이애나처럼 전화벨이 또다시 울렸다.

한없이 무기력하기만 한 KT와 경찰, 그리고 사칭당한 서울검찰청은 물론 나 자신이 그토록 밉게 느껴졌던 적도 없었다.

이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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